아직 쓰여지지 않은 나의 것들 [시인 류시화 님]
아직 쓰여지지 않은 나의 것들을 좋아한다
기억보다 오래된 산들을 좋아한다
희고 긴 다리로 자작나무 숲으로 달려가는 바람을 좋아한다
신의 손금 같은 허공의 잔가지들을 좋아한다
물속에서 얼굴을 부비는 두 개의 돌을 좋아한다
번개의 순수한 열정을 좋아한다
단 하나의 육체를 상속받은 개똥지빠귀를 좋아한다
겨울에만 태어나는 입김의 짧은 생애를 좋아한다
새벽빛보다 먼저 들판을 가로지르는 어린 동물을 좋아한다
밤새 생각이 낳은 알들 위로 내리는 싸락눈을 좋아한다
여러 개의 보조개로 웃는 감자를 좋아한다
호미에 속살이 드러난 고구마, 어렸을 때 치아 교정을 한 옥수수를 좋아한다
섬 뒤에서 사랑을 나누는 뭉게구름,
죽은 새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높새바람을 좋아한다
겨울 하늘을 나는 쇠기러기들의 각도를 좋아한다
바람을 가르기 위해 앞장서서 나는 길잡이 새를 좋아한다
달과 태양 사이의 공간을 좋아한다
입에서 해초 내음을 풍기며 절벽을 물어뜯는 파도를 좋아한다
나리꽃 입술에 박힌 점들을 좋아한다
연꽃의 얼굴을 빚어내는 진흙을 좋아한다
저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쏙독새를 좋아한다
오래된 나무 속에 서 있는 오래된 영혼을 좋아한다
얼음 구멍에서 내다보는 투명한 눈의 물고기를 좋아한다
옥수수 밭에 퍼붓는 비를 좋아한다, 옥수수 잎을 춤추게하는 비를.
발품을 팔아 발견한, 짧은 생의 풀꽃을 좋아한다
새를 그리기 전에 나무부터 그리는 사람을 좋아한다
노을 쪽으로 스무 걸음 떨어진 강을 좋아한다
상처가 꽃이 된 사람을 좋아한다
별을 보기 위해 불을 끄는 사람을 좋아한다
침묵 수행 중인 수도자와 나누는 필담을 좋아한다
행성의 한 귀퉁이에서 봄이면 맨 먼저 밝아오는 노랑제비꽃을 좋아한다
여기는 낙타의 행성이고 우리는 침입자라는 말을 좋아한다
적신호에도 멈추지 않는 사랑을 좋아한다
빛을 들고 어둠속으로 들어가면 어둠을 알 수 없다고 말한 시인을 좋아한다
가는 실에라도 묶여 있는 새는 날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 어느 성인을 좋아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시들보다 아직 써지지 않은 시를 좋아한다.
- 바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시 <선택의 가능성들>에 이어서 쓴 시인 류시화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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