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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 염상진 김사용,
김범우 자제 김경철 김희숙, 김범우 아내, 김범준 독립운동, 문서방, 대밭골, 인민재판, 하대치,
미군정, 여운형, 조선인민공화국, 한민당 민족반역세력 친일파 민족반역자,
청년단 백색테러, 남한 단독정부 수립, 묽은 어둠 그믐달, 풀꾹새
살강,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3장 민족의 발견 ( 제 1 부 한의 모닥불) 3. 민족의 발견 김범우는 설핏 들었던 잠을 가위에 눌려 깬 다음 더는 잘 수가 없었다. 몸부림치듯 뒤척이다가 결국 일어나 앉고 말았다. 매일밤 되풀이되는 고통이었다. 그는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으며 머리칼을 쥐어뜯듯이 움켜잡았다. [김범우] "염상진..." 신음처럼 흘러나온 소리였다. 그의 기진맥진한 의식을 염상진은 줄기차게 따라붙으며 괴롭히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의 의식은 예리한 칼질을 당한 것처럼 무수한 가닥으로 갈가리 찢겨졌고, 그 가닥이나마 간추리려고 안간힘하다 보면 어느새 염상진이 불쑥 나타나 마구 헝클어놓고 말았다. 승패가 자명한 그 싸움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불면의 밤, 일 초 일 초를 넘길 때마다 몸 속의 피가 한 방울씩 말라드는 것 같은 고통에 그는 신음했다. 매일 밤을 그렇게 보내다 보면 언젠가는 하얗게 표백된 껍질만 남은 죽음을 만나게 될 것만 같았다. 희게 박제된 허수아비 꼴의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 과정을 견뎌내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죽는 것보다 차라리 염상진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얻어맞아 팔이고 다리고 뚝뚝 부러지고 피 철철 흘리며 단숨에 죽고 싶었다. 그러면 염상진의 체세포 하나하나, 아니 뼛속 깊이 깊이까지 사무친 원한과 증오도 어느 정도는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염상진이란 사나이는 그렇게 감정적이고 단순하고 즉물적이지 않았다. 김범우는 머리칼을 움켜잡았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느리게 손을 뻗쳐 담배를 집어 불을 붙였다. 심호흡을 하듯 담배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두 번, 세 번, 그의 혼란한 의식이 안개에 젖듯 여릿 여릿 흔미하게 흔들렸다. 잠시 불투명하게 바뀌는 가벼운 최면상태의 아늑함에 젖어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둠 속이어서 그런지 담배 끝에 매달린 불꽃의 색깔이 갓 피어난 아침 꽃의 색깔처럼 싱싱하고 선명했다. 그는 무슨 예시처럼 그 두 가지 색깔이 지니는 공통점을 문득 깨달았다. 그건 생명감이었다. 불꽃, 타오르는 불꽃이 지니는 생명감, 그는 서둘러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빨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연기를 삼키지 않았고, 두 눈동자는 빠알갛게 타드는 담뱃불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투명한 밝음과 싱싱한 색깔로 타는 불꽃에서 그는 염상진을 보고 있었다. 불꽃을 물고 타는 한 개비의 담배, 어쩌면 그건 바로 염상진인지도 모른다. 불꽃이 타오르는 정열로, 불꽃이 타오르는 생명력으로 자신이 신념하는 세계를 위해 타오르는 사나이. 그러나, 불꽃이 다 타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건 회색빛 재일 뿐이다. 그것만큼 완전한 허무가 또 어디 있을까. 그것은 불꽃의 현란한 생명력 때문에 더 완전한 허무가 되는 것이다. 염상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이런 발상부터가 뿌리 박힌 부르주아 근성이라고 일축해버릴지 모른다. 과연 인생이라는 건 무언가. 그 유한 할 수밖에 없는 삶, 어쩌면 담배 한 개비의 길이밖에 안될지 모르는 과정을 살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염상진이 태우는 불꽃, 그건 사회주의 혁명 완수일 것이었다. [김범우] "염상진..." 김범우는 또 신음하듯 염상진의 이름을 뇌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디선지 가을벌레 우는 소리가 가늘면서도 예리한 음향으로 울리고 있었다. 그 음향에는 가을의 우수한 적막이 실려있었다. 그 소리가 유난히 가슴 깊이 감겨오고, 슬픈 허망감이 뭉클 솟는 걸 느끼며 김범우는 쓸쓸히 웃었다. 집을 도망쳐나와 이렇게 살아 있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는 끝없이 서글프기만 했다. [염상진] "범우, 빨리 피하게. 자네 춘부장 어르신은 몰라도 자네의 안전까지 내가 보장할 수는 없네. 자네한테 이런 말 미리 하는 것은 우정 때문이 아니네." 그날 밤 꼭 귀신처럼 느닷없이 나타난 염상진은 그 느닷없음과 똑같이 아무 설명 없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김범우는 가슴이 쿵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염상진은 체포되어 1년 형을 살고 나왔다. 그 다음부터는 잠잠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금년 3월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 실시가 공포되고, 그 준비가 본격화되자 좌익계 반대폭동이 전국적으로 극렬하게 일어났다. 그때 염상진은 지하조직화되어 있던 부하들을 이끌고 경찰서를 습격했다. 그 실패로 7개월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그가 밤중에 느닷없이 나타난 것과 그 말하는 품의 당당함으로 보아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김범우] "형님, 무슨 말이오. 앉어서 차근차근 좀 말해보시오." 짐작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김범우는 염상진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염상진] "나 그럴 시간이 없네. 간단하게 말해서, 마침내 혁명의 날이 왔네. 이번에는 먼젓번 같은 것이 아니라 군인들과 힘이 합쳐진 결정적인 것이네. 그쯤 알고 오늘 밤중으로 피하게. 내 말 우습게 알고 뭉기적이다가 체포되면 그땐 난 모르네. 이만 가네." 염상진은 눈빛을 번쩍 빛내고는 홱 돌아섰다. 김범우는 그의 팔을 틀어잡았다. [김범우] "체포되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염상진] "자네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인가? 혁명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숙청을 말이야." 김범우는 염상진의 냉담한 말투에서 핏빛 살기를 느꼈다. 체포. 혁명. 숙청 그런 단어 탓만이 아니었다. 염상진의 수염이 까칠하게 돋은 견고한 얼굴, 땟국에 쩐 옷,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풍겨내고 있는 살기였다. [김범우] "그런데 어찌 우리 아부님은 괜찮다는 겁니까?" [염상진] "나 바쁘다니까." 염상진은 김범우의 손을 뿌리쳤다. 김범우는 비척하며 놓친 팔을 다시 붙들었다. [김범우] "형님, 말해야 합니다." [염상진] "날 그리 못 믿겠으면 아부님 모시고 함께 피해." 염상진은 경멸적인 웃음을 입가에 차갑게 물고 있었다. [김범우] "못 믿는 게 아니고, 나는 안되고 아부님은 괜찮은 게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염상진] "자네가 알 턱이 없지. 그건 인민이 정하는 기준이니까." 염상진은 김범우의 손을 뿌리치고 나갔다. 그는 더 이상 염상진을 붙들 기력이 없었다. 자네한테 이런 말 미리 하는 것은 우정 때문이 아니네. 염상진의 말이 귀청을 찢을 것처럼 왕왕왕 울려대고 있었다. 그 말뜻을 도무지 해독할 수가 없었다. 우정 때문이 아니라면 그럼 무슨 공적 때문인가. 언제라도 한번 자신이 그들의 일을 도운 적이 있었던가.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그 동안 자신이 취해왔던 언행은 직접은 아닐지라도 간접적으로 방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도움은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와의 교분은 2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있었고, 자신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를 형님이라 호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굳이 우정 때문이 아니라고 못박고 있었다. 우정 때문인 탓에 그는 그것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혁명의 적으로 마땅히 숙청해야 될 존재를 사사로운 정분에 의해 피신시킨다는 것은 분명 죄악일 터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어떤 명분을 찾아내고 우정이 아님을 강조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명분이 객관적 힘이 없다는 것은, 자네의 안전까지 내가 보장할 수는 없네, 내 말 우습게 알고 뭉기적이다가 체포되면 그땐 난 모르네, 라고 한 그의 말이 충분히 입증하고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객관적 명분은 어떤 것인가. 아버지가 읍내에서 손꼽히는 지주 중의 한 사람인 것은 강아지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건 인민이 정하는 기준이니까. 김범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인민이 정하는 기준, 그건 넘어설 수 없는 난해한 벽이었다. 그리고 '인민'이라는 단어는 야릇한 불안감을 몰아왔다. 김범우는 서둘러 안채로 갔다. [김사용, 김범우 부친] "그래..., 상진이가 시키는 대로 니는 얼렁 피해라." 김사용은 미간에 골이 패도록 내리감았던 눈을 뜨며 결론짓듯이 말했다. 김범우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에서 괴로운 체념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건 격변하는 시대의 물결에 부딧치며 최근 몇 년을 살아낸 아버지의 탈진한 모습이기도 했다. ? [김범우] "아부님은 어쩌시구요 " [김사용, 김범우 부친] "..." 김사용은 다시 눈을 내리감았다. 김범우는 그 침묵이 침묵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김범우] "염상진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많이 변해 있어요." [김사용, 김범우 부친] "걱정 말고 니나 얼렁 채비해라." [김범우] "저 혼자 어떻게..." [김사용, 김범우 부친] "암시랑 않을 것이다. 나는 상진이를 잘 안다. 지가 자신허지 못 헐 일이라면 일삼아 우리집에 오지도 안했을 것이다. 상진이는 그리 허술헌 사내가 아니여. 나는 상진이를 믿어." 김범우는 아버지가 염상진을 마치 자식 이름 부르듯 하는 것을 듣자 가슴이 먹먹해오는 감정의 굴절을 느꼈다. 아버지는 염상진이 타고난 낮은 신분의 피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의 총명함과 사리 분명함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기 자식이 염상진과 호형호제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서로 다른 입장에서 마음의 진부(眞否)를 놓고 머뭇거리게 된 것이다. [김범우] "아무래도 아부님도 떠나셔야 헐 것 같습니다." [김사용, 김범우 부친] "어허, 쓰잘디웂는 소리. 상진이 지를 못 믿겄으먼 이 애비도 피허라고 허드람서. 그 말이 무신 뜻이냐. 상대방이 내보인 진심을 믿지 않는 것만치 큰 죄가 웂는 법이며. 그때부텀 생사람 잡는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가그라, 싸게 떠나." 아버지의 말을 더 거역할 수가 없었다. 김범우는 암울한 심정으로 댓돌을 내려섰다. 마당으로 나선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긴 한숨을 어두운 허공에 토해냈다. 농밀한 어둠 속을 잠시 표류하던 그의 의식은 문득 별들의 존재를 깨달았다. 별들은 어둠의 저편 멀고 깊은 곳에서 어둠의 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가을 별들이라서 그런지 그 자리가 멀면서도 완연해 보였고, 새벽 샘물에 씻어낸 것 같은 그 해맑고 초롱초롱한 반짝임들은 금방 제각기 다른 무수한 방울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저 무질서한 것처럼 흩어져 있는 수많은 별들의 완전한 질서처럼...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염상진은 이미 저 우주 공간을 광포한 무법자처럼 거대한 꼬리를 이끌고 날아 다니는 위험스러운 별, 혜성이 되고자 하고 있었다. [김범우 처] "여보 어쩌실랑가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그를 일깨웠다. 아내의 근심스러운 얼굴이 김범우의 멍한 눈길에 잡혔다. [김범우] "우선 들어갑시다." 김범우는 번잡스러운 생각들을 떼쳐내기라도 하려는 듯 걸음을 빨리 했다. 아들 경철이와 딸 희숙이는 조그맣게 잠들어 있었다. 김범우는 두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범우 처] "염상진 그 사람..." [김범우] "여보!" 김범우는 아내의 말을 제지하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 주춤한 자세의 겁에 질린 아내의 모습을 보자 그는 자신의 태도가 너무 격했음을 깨닫고, [김범우] "여보, 당신은 바깥일에 신경 쓸 거 없소. 눈치껏 알아차리고 그때 그때 마음에 새기면 되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마음에 있는 소리를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라는 것이오. 이 시끄럽고 불안한 시국에 입단속 잘못했다간 엉뚱한 화를 입게 될지도 모르니까." 가능한 한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아내는 죄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김범우는 다시 두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조그만 것들의 잠자리에 함께 잠들어 있는 평화를 보았다. 그 새근거리는 숨소리, 꾸밈이 없는 평온한 얼굴, 거기에 깃들여 있는 안온한 시간과 공간이 가장 진정한, 순금의 평화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그 평화가 어른들의 각기 다른 욕심 사이에서 언제 깨어질지 모를 위기에 처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첫아이를 갖고 며칠이 지나 우연히 아이의 눈을 들여다본 일이 있었다. 그 티끌 하나 없이 깊고 맑은 눈동자는 한마디로 경이였다. 아, 이것이 바로 진짜 사람의 모습이구나! 그는 깊이 경탄해 마지않으며, 너나 없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같이 핏기 띤 눈을 가진 어른들이 갈 데 없는 죄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성장한 인간에 대한 혐오이기도 했다. 김범우는 천천히 팔을 뻗쳐 두 아이의 손을 차례로 감싸잡았다. 작은 조가비 같은 손을 흐르는 따스한 체온이 찡하니 심장을 울려왔다. 학병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결혼을 독촉하는 아버지의 성화에 시달려야 했다. 학병기간을 남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거치는 동안 그의 의식은 넝마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해방이고 뭐고, 그는 삶의 의욕을 거의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절망감이 아버지의 성화를 어느 기간까지 유보시킬 수 있는 설득력을 지닌 것이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다. 더구나 아버지의 주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형 범준이 독립운동에 가담해서 집을 떠나버린 것이 15년이 넘었고, 아버지는 손자를 보지 못한 채 70고개에 마주 서 있는 형편이었다. 김범우는 아무런 감동 없이 결혼이라는 절차를 밟아 한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두 자식이 태어날 때마다 기쁨보다는 비애에 가까운 서글픔이 일어나고는 했다. 그건 그 생명들의 장래를 어둠으로 예감하는 연민 탓이었다. [문서방] "서방님, 채비 다 끝났는디요." 밖에서 이 말이 들리자마자 김범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범우] "나오지 말고, 애들 잘 살피시오." 따라 일어선 아내는 원망스런 얼굴을 떨구었다. 김범우는 아버지가 정한 거처인 대밭골 문 서방 집을 향해 20리 밤길을 걸어야 했다. 다음날 오후, 밤을 예비하는 10월의 스산한 바람결이 대이파리 사이사이를 흐르고, 비껴 쬐는 열기 잃은 햇살이 무수하게 많은 대이파리의 미세한 떨림 위에서 그 수효만큼 많은 빛의 조각으로 부서지고 있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김범우는 헐레벌떡 뛰어든 문 서방으로부터 읍내 소식을 들었다. [문서방] "서방님, 작은서방님, 읍내에 생난리가 터져부렀구만요. 어지께 밤에 좌익시상이 되야부렀어라. 순사란 순사는 다 도망가뿔고 빨갱이덜 손에 경찰서가 불타고..." [김범우] "문 서방, 아부님은 어찌 되셨소?" 김범우는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벌떡거리는 걸 억누르기라도 하듯 소리쳤다. [문서방] "어르신네요?" 갑자기 말을 제지당한 문 서방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잠시 멀뚱해 졌다가, [문서방]"아아, 어르신네요, 암시랑토 안혀요" 하며 안도하는 웃음을 천진하도록 지어보였다. [김범우] "무사하시단 말이오?" [문서방] "하먼이라. 댁에 편히 기신당께요." 문 서방은 답답하다는 듯 목청을 돋우었고, "알겠소" 하며 김범우는 허물어지듯 평상에 주저앉았다. [문서방] "작은서방님, 워디 아프신 게라? 얼굴이 똑 죽을 상인디." 문 서방이 창백해진 김범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당황해 했다. [김범우] "아니오, 금방 괜찮아질 거요. 조금 있다가 읍내 이야기나 차근차근 들어봅시다." [문서방] "야아, 허고말고라. 참말로 간이 콩알만해지는 무선(무서운) 귀경거리 드만요." 문 서방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섰다. 문 서방의 두서없고 잡다한 이야기 중에서 뼈대를 간추리면, 좌익사상을 가진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거기에 민간인 지하조직이 합세한 것이었다. 그건 어젯밤 염상진이 했던 말과 일치했다. 그리고 경찰들이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 그 세력 또한 염상진의 말마따나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인 모양이었다. 문 서방은 그 반란이 어디서 시작 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다만, 총을 쏘아대는 반란군들이 진트재를 넘어 읍내에 들어왔고, 다른 부대는 조성 쪽에서 왔다고 했다. 문 서방은 흥분을 앞세워 그저 총을 가진 반란군, 도망간 순사, 헐렁한 핫바지 저고리에 빨간 완장을 찬 좌익들, 이런 것들에 관심을 쓸 뿐이었다. 반란군이 진트재를 넘어온 것이 확실하다면 그쪽으로 직결되는 도시는 순천이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바로는 순천에는 반란을 일으킬만한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지 않았다. 있다고 해야 고작 2개 중대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여수와 목포, 그 어디에서 발단된 것이리라 싶었다. 어쩌면 그 두 곳의 병력이 합세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란군이 진트재를 넘어 벌교를 장악했다면 순천은 이미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 갔기가 십상이었다. 벌교가 그 지경이 되었으면, 이어서 보성과 고흥까지도 위험할 것이었다. 이런 추리를 해나가면서 그는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들었다. 해방이 되고 3년을 거쳐오는 동안 쉴 새 없이 일어난 사회 격랑과 정치적 사건들은 하나같이 민족의 운명을 불행 쪽으로 몰아붙이는 것들뿐이었다. 그의 의식 속에서는 성난 소가 끄는 수레바퀴처럼 그가 겪어내고 목격했던 수많은 사건들이 제각기 소리치고 냄새풍기며 굴러가고 있었다. 그 격렬한 회전을 하는 사건들은 멀리로는 학병시절에서부터 가까이는 금년 봄에 치른 단독선거에까지 걸쳐진 것이었다. 그 기억의 수레바퀴는 한번 구르기 시작하면 점점 가속도가 붙었고, 그에 따라 그의 감정도 열도를 높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고, 그 절정에서 그는 문득 현실이라는 절망의 벽을 만나고, 그 순간 그의 뜨거워진 감정은 그 만큼의 반대 온도로 일순간에 냉각되어버리고, 그 감정은 조각조각 깨지면서 그를 절망의 바다로 끝도 없이 빠뜨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도 주기적 발열을 보이는 열병을 앓듯 어떤 충격적 사건에 부딪치거나, 극히 염려스러운 문제가 야기되면 또 감정의 회전을 되풀이하고는 했다. 김범우는 숨을 몰아쉬며 회전을 시작하려는 감정에 제동을 걸려고 애를 썼다. 자신의 앞에 펼쳐진 현실은 전과 같은 절망의 벽이 아니라 죽음인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정신 바짝 차린 문 서방이 가져오는 소식을 대하며 김범우는 절망감에 휘말리고 있었다. [문서방] "작은서방님, 작은서방님, 어르신네가, 어르신네가 살아나셨구만요, 살아나셨 다니께요." 문 서방이 사립문을 차고 들며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김범우] "무슨 소리요, 문 서방!" [문서방] "긍께 머시냐, 이, 이, 인민재판에서..." 김범우는 전신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허탈에 빠져 비칠비칠 주저앉으며 말했다. [김범우] "자세히 얘기해보시오." [문서방] "긍께, 어르신 차례가 되얐는디, 워메 참말로 환장허겄등거. 어르신네는 두 눈 딱 감고 단상에 꼿꼿허게 스셨는디, 누가 벌떡 일어남스로 소리질르기를, 김사용은 지주지만 인민의 적은 아니다. 큰아들 범준은 독립투사고 김사용은 독립자금을 댔다. 인민의 피를 제대로 쓴 것이다. 고것만이 아니라 큰아들 김범준은 해방되고 3년이 지난 지금꺼정 소식이 웂다. 못헐말로 죽은 것이라면 조국 독립을 위해 하나뿐인 목심을 바친 것이다. 그라고 지주 김사용은 작인들헌테 질로 후허게 헌 사람이다. 그건 시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렁께 김사용은 숙청에서 빼야 헌다, 고 허드랑께요. 그 말을 위원장이 접수헌다고 발표허고는 또 모인 사람들헌테 워떻게 헐랑가 묻드만요. 우메, 고때 사람 미치겄등거. 근디 여그저그서 옳소, 옳소, 허는 소리가 터짐스로 박수를 안 치겄소. 워메 나는 이때다 싶어 목구녕이 찢어지라 옳소, 옳소, 소리질르고 손바닥이 떨어져 나가그라 박수를 쳤구만요. 그려서 어르신이 화를 면허시고 단상을 내려오시는디... 지가 쫓아가 어르신을 부축험시로 을매나 죄시럽고 눈물이 나든지..." 문서방은 목이 잠기며 눈물을 훔쳤다. 그런 문 서방의 그지없이 착하고 선량함이 그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김범우] "고맙소, 문 서방. 너무 애썼어요." 김범우는 애써 웃어보이며 말했다. [문서방] "무신 당찮은 말씸이시다요. 정작 고마운 사람은 따로 있제라. 어르신 구헐라고 나선 하대치란 사람 말이어라우." 하대치, 귀에 익은 듯한 이름이면서도 딱히 잡히는 것이 없었다. [김범우] "그래요? 그 사람이 누구요?" [문서방] "하매 작은서방님도 알 성 불른디요. 위원장 염상진얼 그림자 맹키로 따라댕김서 빨갱이 허다 징역살이도 항께 헌..." [김범우] "아, 알았어요." 김범우의 기억 저편에서 흐리게 떠오르는 사내가 있었다. 얼굴 생김은 거의 기억이 없고, 키가 작은 다부진 체격에 꼭 돌덩이 같은 인상을 풍기던 사내였다. 염상진이 출감해서 돌아 오던 날 역에 마중 나갔다가 보았던 것이다. [문서방] "하대치 그 사람이 어르신네 소작을 부친 것도 아니고, 무신 은혜럴 입었다고 그리 발벗고 나섰는지, 참말로 모를 일이랑께요." 문 서방은 영문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건 염상진이 꾸민 완벽한 연극 이었다. 그러나 대사로 사용된 아버지의 행적까지 연극은 아니었다. 그건 있는 그대로였다. 남들과 똑같이 체포를 해가고, 인민재판에 회부하고, 부하를 시켜 발언하게 하고, 그리고 석방시키는 과정을 거친 염상진의 의도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았다. 공적인 목적과 사적인 정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별로 흠 잡힐 데 없는 아버지를 인민재판을 거쳐 석방시킴으로써 자기네들의 공정성과 신중성을 널리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지주들을 처단하는 확실한 이유 설명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그의 어린 날로부터 따뜻한 정과 깊은 이해를 베풀어온 아버지를 떳떳하게 보호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 번의 행위로 두 가지 이상의 목적을 충족시킬 줄 아는 염상진, 그는 역시 단세포가 아니었다. [문서방] "헌디 말이요, 서방님. 인민재판이라등가 먼가가 끝나고 쥑이는 굿판이 벌어졌는디, 워메징허기도 허고..." [김범우] "어디서 말인가요?" 김범우는 문득 생각에서 깨어나며, 한결 느긋해진 태도로 말하고 있는 문 서방에게 눈길을 돌렸다. [문서방] "워디긴 워디어라, 북국민핵교 마당에서 인민재판을 끝내고 그 질로 소화다리로 끌고 갔구만이라. 사람덜이 벌떼 맹키로 모였는디, 사람덜헌테 귀경 시키대끼 줄줄이 세워놓고 쥑였당께요." [김범우] "문 서방도 그걸 구경했단 말이오?" [문서방] "하먼이라, 징허기는 혔어도 그건 돈 내고도 못 헐 존 귀경거리였는디요." [김범우] "그게 무슨 소리요, 문 서방. 남들은 죽어가는데 그걸 보고 좋은 구경거리라니." 김범우의 음성은 뜨거웠고 눈 가장자리에는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문서방] "존 귀경거리고 말고라. 죄는 진 대로 가고 공은 닦은 대로 간다고, 즈그눔 덜이 평소에 웂이 사는 사람덜 아프고 씨린 맘 몰라주고 행투 고약허게 해감서 배 터지게 묵고 살았응께 고렇게 당혀서 싸제라. 고것들이 하나씩 죽어 자빠지는디, 씨엉쿠 잘됐다. 씨엉쿠 잘되얐다, 허는 소리가 속에서 절로 솟기드만요. 고런 맘이 위디 나 혼자뿐이었을 랍디여. 말을 안혔응께 그렇제 귀경허는 전부가 다 똑겉은 맘이었을 꺼구만이라." 문 서방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해 있었다. 그의 눈은 증오로 타고,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김범우는 하나의 악마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머금던 아까의 그 착하고 선량하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김범우는 섬뜩하게 끼쳐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김범우] "문 서방, 애썼어요. 그만 쉬도록 해요." 김범우는 땅바닥을 내려다본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문 서방이 돌아서고 나서도 김범우는 의식의 공백 속에 빠져 있었다. 그는 사고를 정리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혀 다른 두 모습의 문 서방, 그 어느 쪽이 진짜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표변할 수 있는가. 그 어느 쪽이 진실인가.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이중적일 수 있을까. 그때 퍼뜩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염상진] "있는 자들은 자기들만 사람인 줄 알지. 더러 그렇지 않은 우등생도 있지만 말야. 난 그 단순한 자만을 고맙게 생각하네. 거기에 우리가 설 자리가 있고, 그게 그들 스스로가 빠져들어갈 함정이니까." 염상진의 말이었다. 그렇다, 인간은 복합적 사고와 다양한 감정의 줄기를 소유한 동물이다. 문 서방의 전혀 다른 두 모습은 그런 인간의 속성이 표출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모습은 다 문 서방의 참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외부의 영향과 상황에 따라 그것은 반응하는 것이다. 문 서방은 아버지에게는 선한 인간으로 반응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한 인간으로 반응한 것 뿐이다. 만약 아버지가 악한 지주였다면 문 서방은 여지없이 악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 서방의 악은 악이 아니라 선인 것이었다. 염상진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확대되어오고 있었다. 문 서방은 연거푸 이틀을 끔찍한 소식만 가지고 왔다. 김범우는 속이 메슥거리다 못해 생 목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견뎌내며 문 서방의 이야기를 다 들었다. 죽이는 자와 죽는 자가 대치한 현장, 그 빛과 어둠으로 양분된 극단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이 현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던 것이다. [문서방]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 이라. 재미가 오진 싸까쓰도 똑겉은 거 두 번씩 보먼 질리는 법인디,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허 겄 구만요. 그라고, 그 사람덜이 가난허고 배 곯는 사람덜 편이랑께 나쁠 것은 없는디, 사람도 지각각 죄도 지각각이라고, 사람마동 진 죄가 달블 것인디 워째서 마구잽이로 쥑이기만 허는지, 날이 갈수록 그 사람덜이 무서짐스로 겁이 살살 난당께요." 김범우는 놀란 눈으로 문 서방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건 바로 염상진이가 빠지고 있는 함정이었다. 염상진이 문 서방의 말을 들었으면 무어라고 할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김범우는 염상진의 그런 과감하면서 격렬한 행동전개를 비난 하거나 비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하는 조직 속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의 행동이 그렇게 전개되고 있는 것은 전체 조직의 통일된 방법이었고, 그런 방법이 동원되기까지는 현실적인 필연성과 당위성이 엄연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무장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군정의 무력탄압에 그 명백한 원인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행위를 '폭력'으로 간주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방어적 폭력'이었고 '상대적 폭력'이었다. 미군정은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 부인, 친일파 핵심세력인 한민당의 옹호, 민족반역세력인 구.경찰 출신들의 재등용 비호, 공산당 활동 불법화, 청년단 구성과 백색테러 감행, 공산당원들의 무차별 체포와 조직 파괴공작,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폭력행위를 조직적이고 단계적으로 시행해왔던 것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남로당은 지하활동 속에서도 수난과 피해로 얼룩진 세월을 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차별한 폭력 앞에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또 다른 폭력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제국주의적 지배술수에 말려 든 것일 수 있었고, 군정이 더 가혹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타당성과 근거를 만들어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쪽의 폭력이 상대의 폭력을 이기지 못할 때 그건 자멸의 길을 재촉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게 폭력의 생리이고 법칙이었다. 염상진이나 그 조직은 이번에 일으킨 행동으로 과연 미군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김범우는 자신이 귀국해서 벌이게 되었던 논쟁을 지금쯤 염상진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것인지 궁금했다. 그때 자신이 예상했고 주장했던 것처럼 군정은 치밀하고 철저하게 공산당 파괴로 일관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남로당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어오고 있었다. 10.1폭동, 2.7구국투쟁, 4.3사건을 거치면서 조직의 약체화로 치달아온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염상진은 자신들의 방법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김범우는 그 '방어적 폭력'의 외로움과 한계성이 너무 답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김범우의 불면증은 점점 깊어갔다. 김범우는 1943년의 막바지 12월을 방에서만 보내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겨울 들판처럼 황량했고, 겨울 하늘처럼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유일한 일과는 해거름이 되어 집을 나서서 중도방죽을 한정없이 걷다가 어둠에 묻혀 돌아오는 산책뿐이었다. 1944년 1월 5일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최소한 그때까지는 생존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학도병을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과 맞걸리고 있었다. 만약 삶을 내던지기로 작심했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날을 넘긴 다음에 할 일이었다. 겨울방학이 되어 동경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학병참전이 피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의 아버지 김사용은 벌써 수차에 걸쳐 경찰서에 불려다닌 다음이었다. 경찰서에서 김사용을 호출한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큰아들 김범준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읍내 사람들은 누구하나 입에 담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서장은 김사용과 함께 활을 쏘거나 꿩사낭을 다니거나 할 정도로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사용은 엄청나게 많은 돈을 일본에 희사했다는 소문이 와짝 퍼졌다가는 금세 사라지고는 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 수문을 빨리 감추려 했고, 그때마다 김사용을 욕하기는커녕 장한 사람으로 마음에 새겼다. 그건 모두 독립운동을 하는 아들로 인해 치르는 고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사용을 호출한 경찰서장의 태도는 완강했다. 작은아들을 학병에 내보내지 않으면 큰아들의 행위를 공개수사에 부치고 김사용에게도 연대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김사용의 그 어떤 제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작은아들이 귀국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엉거주춤한 유보를 해놓은 상태였다. 김범우는 어머니를 통해서 사건 전말을 듣고 나서 곧 마음을 작정하고 말았다. 학병에 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형은 독립운동을 하고 동생은 학병으로 참전해야 하는 기구함을 되씹으며 밤을 새웠다. 그리고, 아침 일찍 경찰서장을 만나러 갔다. 경철서장 앞에서 학병지원서를 썼다. 그런 다음 김범우는 그 사실을 아버지께 말했다. 김사용은 방바닥에 시선을 떨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차마 작은아들을 바라볼 면목이 없었고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11 염상진이 불쑥 찾아든 것은 그믐날 밤이었다. 구두를 신은 채 방으로 뛰어든 그는 다짜고짜 내쏘았다. [염상진] "자네 학병 나가기로 했담서?" [김범우] "형님, 이거 어쩐 일이요.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요?" [염상진]"가세, 개돼지처럼 끌려갈 날만 기다리지 말고 나허고 가세." 염상진의 기세는 곧 김범우를 끌고 나갈 것처럼 열 받쳐 있었다. 김범우는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듯 방바닥에 주저앉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김범우]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쇼." [염상진] "남 일?" 염상진의 얼굴이 딱 굳어지는 것 같더니 금방 부드럽게 풀리며, [염상진] "자네 억지소리 허는구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허는 자네 심정 내 다 알고 왔네. 요런 난감헐 때는 누구한테나 어떤 계기가 필요헌 법이네. 가세, 내가 자넬 안전허게 피신시켜줄 테니까." [김범우] "형님 맘은 고맙지만 그건 안돼요." 김범우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염상진] "자네 정신 똑똑허니 차려야 쓰네. 자네 어르신이 일본놈들 헌테 기부금 내는 것허고, 자네학병 지원허고는 생판 다른 문제니까. 자네 행동도 그렇게 이해되고 용서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네. 그건 자네 독단적인 문제고, 자네가 잘못 행동하면 범준이 형님 업적까지 똥칠허는 것이네. 일본놈들 공갈협박에 굴복허지 말고 저항해야 허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용기있게 박차고 나허고 가세. 요건 마지막 기회네." [김범우]"형님 말 고맙지만 난 그럴 용기가 없군요." 김범우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염상진] "돼지처럼 학병에 끌려갈 용기는 있고!" 염상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눈이 불을 뿜고 있었다. [김범우] "형님이 가진 용기만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내게도 따로 계획이 있어요." 염상진의 눈을 맞쏘아보고 있는 김범우의 눈에는 염상진이 뿜고 있는 열기를 능히 받아낼 만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염상진]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염상진이 침을 뱉듯이 말하고는 돌아섰다. 김범우는 그가 피신중인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범우] "형님, 조심해 가시오." 김범우는 다급히 뒤따라 나가며 말했다. 염상진은 소작쟁의 때문에 형을 살고 출감하자 뒤따라 나온 징집영장을 피해 자취를 감추었었다. 그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찾아온 마음이 너무 고마웠고,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헤어질 수 없는 것이 김범우로서는 너무 가슴 아팠다. 김범우는 1946년 1월이 다 저물어갈 즈음에 학병에서 돌아왔다. 집을 떠난지 꼬박 2년 세월이 흘러 있었다. [김범우 모친]"워디 보자, 내새끼 워디 보자. 니를 영영 못 보고 죽는 줄 알었다. 요런 무정헌 것아, 워디서 멀 허다가 인자사 오냐 금메. 넘덜언 다 오는디 니만 안오니께 이 에미 속이 워쨌을 것이냐. 타고타고 또 타고, 참말로 영영 못보고 죽는 줄 알었다. 위디 보자, 워디 보자." 병색이 완연한 어머니는 김범우의 전신을 더듬고 또 더듬으며 한정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해방이 되는 날부터 두 자식을 기다리며 밤낮없이 흘렸을 눈물로 벌겋게 짓물러 내려앉은 어머니의 눈자위를 보며 김범우는 속 울음을 씹었다. 거기엔 모성의 질기고도 아픈 인내가 응결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득병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게 해방의 의미는 두 아들을 다시 품에 안는 것이었을 터였다. 그런데 응당 돌아와야 할 두 아들은 한 달, 두 달, 석 달, 그리고 해가 바뀌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석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다 저승객이 된 것이라는 파다한 소문을 어머니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그 어떤 매질보다 아픈 그 소문의 공포를 어머니는 견뎌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김사용, 김범우 부친] "몸은 성하냐?" 절을 받고 난 아버지의 첫 물음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물음이 나올때까지 아버지는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김범우는 보료 끝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런 아버지를 쳐다보지 않았다. [김사용, 김범우 부친] "그려, 워디서 멀 허니라고 그리 오래 걸렸냐?" 아버지의 이 두 번째 물음은 꼭 대답을 듣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 동안의 애태운 기다림에 대한 어머니와는 다른 감정 표현이었다. 설령 그것이 아니었다 해도 김범우는 자신이 거쳐온 2년동안의 생활을 결코 입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김사용, 김범우부친] "가그라, 건너가 쉬어." 아버지는, 을매나 고단허겄냐, 하는 말을 혼잣말처럼 낮게 뇌었다. 김범우가 기억의 무덤 속에 영원히 묻어버리고자 했던 2년 동안의 행적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부터 들춰지게 되었다. 순천 주재 미 군정청에서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그 날도 김범우는 끈끈한 잠의 흡인력에 빨려들어 아침도 먹지 않은채 정오를 거의 보내고 있었다. 수마(睡魔)라는 말이 있었다. 글자의 뜻 그대로 잠의 마귀가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김범우는 속수무책이었다. 처음에는 그 마귀를 떼쳐내려고 약간 노력을 해보았다. 그러나 곧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그가 일으켜 세우려는 의식의 마디들은 그 마귀의 힘에 흐물흐물 녹고 말았다. 그건 딱히 잠도 아니었다. 전신을 가눌 수 없게 어딘가 깊고깊은 곳으로 가라앉히는 질기고도 끈끈한 액체의 피로감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김범우는 거기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는 혼미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가 자꾸만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리끝까지 푹 잠겨 있는 그 끈끈한 액체의 구속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렴풋하긴 했지만 누군가가 부르고 있는 소리를 의식하고, 그 의식에 따라 일어나야 된다는 의식을 하고, 자신이 일어나려고 하는 의식을 의식하는데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은 몸대로, 의식은 의식대로 개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한창길]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순천 군정청에서 왔습니다." 이 소리가 그의 의식과 몸을 순식 간에 하나로 결합시켰다. [김범우] "거기 누구요!" 그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며 문 밖에다 대고 와락 고함을 질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뒤엉켜지고 있었다. 그는 견디기 어려운 역겨움을 느꼈다. [머슴] "저어...군정청에서, 군정청에서 손님이 오셨구만요." 주저하는 목소리는 군정청을 두 번 씩이나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범우는 어이없어하는 웃음을 피식 흘렸다. 머슴까지 무의식적으로 두 번씩 강조할 만큼 그 위력을 떨치고 있는 미군정청에 김범우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망할 자식들, 빨리도 찾아왔군, 하고 생각하며 김범우는 잠시 오늘이 며칠일까 하고 날짜를 가늠해보았다.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김범우] "무슨 일이오?" 김범우는 무감각한 어조로 말하며 방문을 밀었다. 방으로 왈칵 밀려든 건 한 바지게만큼의 1월의 찬바람과 부신 햇살이었다. 그는 숨을 흡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떴다. 햇살을 맞받아 자꾸만 좁아지려는 그의 시야에 머슴과 함께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한창길] "안녕하십니까, 김 선생님." 사내는 입심 좋게 허리를 반으로 푹 꺾으며 인사했다. 김 선생님? 어이없어 코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김범우는 꾹 눌렀다. 서른서넛이 되어 보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사내의 넉살이 역겨웠다. [한창길] "나흘 전에 돌아오셨더군요. 그 동안 편히 쉬셨습니까?" 김범우는 사내의 말을 듣고,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고 깨달았다. 자신은 나흘 동안 줄곧 수마에 붙들려 시간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너 번 밥상을 대하고 몇 차례 변소를 가고는 했지만 그런 행위는 모두 잠에 취한 채 행해진 것에 불과했다. 김범우는 비로소 확실해진 시간을 의식하며 사내를 향해서 똑바로 시선을 던졌다. 사내의 어조는 지극히 부드럽고 예의바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어감은 정반대였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서 모든 걸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잠은 그만 자는게 어떨까요, 사내의 어감은 이런 의미를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사내는 김범우의 눈초리를 의식했는지 흐트러지지도 않은 자세를 다시 고쳐 똑바로 섰다. [한창길] "저는 군정청에 근무하는 한창길입니다. 청장이신 화이트 대위님께서 김선생님을 모시고 오라는 분부를 받들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내가 경직된 음성으로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한달음에 용건을 쏟아놓았다. 김범우는 또 헤설픈 코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눌렀다. 사내는 배고픈 고양이처럼 영악하게 영리한 친구였다. 상대방의 기분 변화를 예민하게 간파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언행의 명암을 뒤바꿔가는 기민성을 보이고 있었다. 직책이 뭐냐고 물어볼까 하는 짓궂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김범우는 그만두기로 했다. 자신의 육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 위인의 됨됨이로 보아 양지 지향성 식물처럼 벌써 여러 번의 배신적 변신을 꾀한 넝마 같은 녀석일 게 뻔했다. [한창길] "급히 모시고 오라는 분부였습니다." 사내는 김범우의 눈길을 견뎌내기가 곤혹스러웠던지 불쑥 말했다. [김범우] "분부라? 그거 어느 나라 말이오?" 김범우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몰려 있었다. [한창길] "네에?" [김범우] "그건 옛날 양반 찌끄레기들이 쓰기 좋아했던 말이오. 요샛말로 하자면 명령이 되겠는데, 그 명령을 나한테 한 거요, 아니면 형씨한테 한거요?" [한창길] "저어, 그거시 그렁께..." 당황한 사내의 입에서는 굳이 쓰기를 피하던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김범우] "형씨 말대로 나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니까 그 명령이 나한테 한 것은 아닌 게 분명한 것 같소. 난 몸이 아파서 못 간다고 가서 전하시오." 김범우는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때 문을 덥석 잡는 손이 있었다. 사내는 어느새 다리를 마루에 걸친 채 문을 붙들고 있었다. [한창길] "선생님, 어쩔라고 이러신당가요. 군정청장 미군 대위의 말인디요." 사내는 김범우의 코앞에 얼굴을 디밀고 다급하게 말했다. 김범우는 울컥 비위가 상하는 걸 느끼며 굳어진 사내의 얼굴에 침을 뱉아버리고 싶은 역겨움을 간신히 참아냈다. [김범우] "날 염려하는 거요? 화이트 대위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미군 대위가 날 어쩌지는 못할 것이오. 그걸 염려했거든 맘놓고 돌아가시오." 김범우를 쳐다보는 사내의 얼굴은 금방 의혹에 찬 두려움으로 덮였다. 사내는 그런 감정의 변화를 전혀 감추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김범우 쪽에서 그런 사내를 보기가 민망했다. [한창길] "김 선생님, 선생님이 훌륭하신 분인 것을 워찌 몰르겄습니까. 김 선생님이 안 가시면 명령수행을 제대로 못 헌 지 입장이 워찌 되겄습니까. 대위님이 찌쁘차꺼지 내주심서 모셔오라 혔고, 길 몰르는 미군 운전수허고 육십리 길을 요렇게 쫓아왔는디, 지 낯을 생각혀서라도 가 주셔야 겄는디요." 사내는 더할 수 없이 비굴하게 애걸하고 있었다. 이 친구가 만약 일본 형사 출신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을 것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김범우는 하고 있었다. [한창길] "그라고 말입니다. 김 선생님, 오늘 안 가신다고 혀서 대위가 그만둘 줄 아신가요? 우리 같은 쫄짜야 깊은 내막 몰르고 눈치로 때레잡는 것이지만, 대위는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을 날마동 보낼 것이구만요. 어채피 한 번은 만나야 헐 판국이라면 날마동 볶이다가 만날 것 머 있는가요. 고름이 살 안되는 법인디, 워쩌실랑가요?" ==사내는 노회한 눈동자를 굴리며 김범우의 감정을 읽어내려 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바로 그 점이 이미 마음에 걸렸었다. 그들은 일단 필요로 하는 일에 대해서 분명한 이유, 확실한 근거, 그리고 충분한 납득이 되기 전에는 결코 단념하지 않는 미련스럽도록 철저한 종족이라는 것을 김범우는 이미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김범우] "가도록 하겠소. 나가서 기다리시오." 김범우는 무표정하게 말했고, [한창길] "선생님, 고맙구만이라, 고마워요." 한창길이라는 나이 든 사내는 가엾을 정도로 감격스러워했다. 김범우는 찬물로 낯을 씻고 몇 푼의 돈을 챙겨가지고 집을 나섰다. 대문 앞에는 지프차가 멈춰 서 있었고, 그 둘레로는 크고 작은 동네 아이들이 경계와 호기심이 엇갈리는 눈으로 차를 애워 싸고 있었다. 핸들에 팔꿈치를 괴고 앉은 흑인 병사는 무료한 듯 느릿느릿 껌을 씹으며 큰 눈을 껌벅이고 있었다. 아이들의 접근을 막듯 뒷짐을 지고 엄격한 표정으로 서있던 한창길이란 사내는 김범우가 대문을 나서는 걸 보고는 재빨리 다가갔다. 김범우의 앞에 이른 사내의 얼굴이 한 순간 일그러졌다. [한창길] "저어...혹시 양복이..." 김범우는 사내의 망설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김범우] "왜, 이 옷으로는 대위를 만날 수가 없겠소?" [한창길] "머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왕이며..." [김범우] "양복보다 이 우리나라 옷이 얼마나 좋소? 이 추위에 뜨뜻하고 몸 편하고, 어서 갑시다." 사내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김범우는 사내의 지적이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며칠동안 입고 뒹굴었던 바지 저고리를 그대로 걸치고 나선 참이었다. 양복을 갈아입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긴 했지만 귀찮고 번거로운 생각이 앞서 외투만 들로 나왔던 것이다. 앞자리에 오르는데 운전병이 "굿모닝 써" 하고 인사했다. "하이, 굿모닝." 거의 무의식적으로 인사를 받고는 김범우는 순식간에 저질러진 자신의 경솔에 어금니를 물었다. 태평양의 외로운 섬 산타 카탈리나를 떠나 샌프란시스코 교외 어느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면서 앞으로는 영원히 영어를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운전병이 '써'라고 존대를 하는 것 조차 뱀 껍질이 닿는 것처럼 싫었다. 위에서는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을 것이고 운전병은 그 명령을 충실히 지킨 것뿐이었다. 그들의 그 철저성이 싫었다. 이제 다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도 그 철저성의 발로였고, 산타 카탈리나 연합군의 동지에서 하룻방 사이에 포로가 되어 샌프란시스코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것도 그 철저성의 실천이었다. = 김범우는 자신이 집에 돌아온 지 나흘밖에 안됐는데 그들의 손이 뻗쳐오는 신속성에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의 정보의 치밀성이나 기민성에 대해서는 이미 산타 카탈리나에서 탄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벌교라는 하나의 읍에 대해서도 전봇대의 수효, 소화다리의 길이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산타 카탈리나에서 벌교 포구의 침투가 제안되었는데, 현지탐사를 한 잠수정에 의해 뻘 밭이 너무 길기 때문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이 닷새 만에 날아들 정도였다. 로스앤젤레스의 근해 산타 카탈리나 섬과 한반도의 구석 벌교 포구와의 거리감으로는 상상도 안되는 일이었다. [한창길] "김 선생님은 미국서 사셨는가요?" 차가 진트재를 올라가고 있을 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가 뭔가를 좀 알아야 되겠다는 듯 마침내 은근하게 물어왔다. [김범우]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마시오. 그건 형씨의 임무 밖이니까." 김범우는 찬바람이 휙 끼칠만큼 매정하게 잘랐다. 사내는 흠칫 놀라며 긴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왠지 모르게 턱없이 거만하게 느껴지는 김범우의 뒤통수를 사납게 노려보며 사내는 마구 욕을 퍼대고 있었다. 좆 겉은 눔, 지랄허고 자빠졌네. 대갱이에 피도 안 모른 새끼가 영어 줄이나 씨불리는 모양인디, 지미럴 워디 두고 보자. 언제고 내 손에 걸려들먼 뻑다구럴 추려뿔 것잉께. [화이트대위] "오우 톰슨,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소." 화이트 대위는 그들 특유의 약간은 허풍스럽고 무절제한 것 같은 몸짓을 지으며 김범우를 맞이했다. 자신을 굳이 '톰슨'이라고 부르는 것에 김범우는 냉소를 보냈다. 일부러 그렇게 호칭함으로써 유대감을 상기시키고, 자기네의 관심의 도를 나타내고, 이쪽의 마음을 일거에 사로 잡으려는 그들의 철저성이 잘 드러난 행동이었다. [김범우] "안녕하십니까, 화이트 대위님, 용건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게 있습니다. 내 호칭에 대해섭니다. 나는 톰슨이 아닙니다. 그 이름은 산타 카탈리나 섬을 떠나면서 잊도록 되어 있던 이름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OSS 첩보훈련원 톰슨이 아니라 조선인 김범우라는 사람인 것을 확실히 구분해주기 바랍니다." 김범우는 일부러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며 딱딱하게 말했다. 그들이 '톰슨'이란 호칭으로 얽고자 하는 그물을 미리 막을 필요가 있었다. 화이트 대위는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이었던지 무척 당황하는 태도를 감추지 못했다. [화이트대위] "아아, 그 점은 내 실수였소, 미스터 김. 기분 나쁘게 했다면 내 사과하겠어요. 난 단순히 반가워서 사용해본 이름일 뿐이었소." 역시 그들다운 솔직하고도 능란한 제스처를 화이트 대위는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제스처에 불과할 뿐 그의 상한 기분까지 회복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김범우는 잘 알고 있었다. [김범우] "왜 나를 불렀는지요?" 김범우는 대위와의 이야기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화이트 대위] "아, 그건 다름이 아니라..." 대위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쩝쩝 마른 입맛을 다시고는, [화이트대위] "미스터 킴이 우리와 함께 일해주기를 바라고 있소." 빠르게 말을 해치웠다. 뻔한 요구였다. [김범우] "산타 카탈리나의 연장으로서 말입니까?" 김범우의 시선은 날카로웠고, 대위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대위는 마땅한 말을 찾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인지 천천히 담배를 빼들었다. [화이트 대위] "우린 능력있는 통역관이 필요하오. 물론 적정보수도 지급하게 될 것이오." 대위는 더듬거리듯 어렵게 말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엷게 웃었다. 적정보수라는 말이 자신을 유혹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김범우] "산타 카탈리나의 일원이 됐던 것도 전적으로 내 개인의 선택권에 의해서였습니다. 더구나 적정보수가 지급되는 통역관의 일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줄 압니다. 대위님의 호의는 고마우나 나는 그 일을 맡을 형편이 못됩니다." 김범우는 그들의 생리에 맞게 명백한 태도를 보였다. 대위는 몹시 당혹해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 당혹해 함이 비위에 거슬렸다. 그것은, 말만 꺼내놓으면 감지덕지할 것이라고 이쪽을 쉽게 생각했던 계산착오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화이트 대위] "미스터 킴, 이건 새로운 당신네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오." 김범우는 또 엷게 웃었다. 대위는 그들다운 마지막 카드를 내민 셈이었다. [김범우]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내 전공은 영문학이 아니니까요." 대위의 얼굴은 보기 민망할 지경으로 일그러졌다. [화이트 대위] "딴 일이라니, 그게 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대위는 야비하게도 회피의 기회를 봉쇄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김범우] "난 선생이 될 겁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새 나라 건설에 그 어떤 일보다 유익하다 고 생각합니다." 김범우는 침착하고도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꾸며대고 있었고, 그런 자신이 그렇게 믿음직스럽고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화이트 대위] "그렇지요, 그렇겠지요. 교육, 그거 중요한 일입니다." 군정청을 나서며 전주가 고향인 박두병을 떠올렸다. 아마 박두병도 자신과 똑같은 제의를 받았을 것이 거의 틀림없었다. 그도 어떤 이유를 붙여서든지 그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동지에서 포로로 바뀐 처우에 대해서 얼마나 분개하고 절망했던가. 그는 미얀마 전선의 같은 소대에서 만나, 나흘 전 인천항에 귀국해서 헤어질 때까지 2년여를 그야말로 생사고락을 같이한 기막힌 사이였다. ==그와 함께 일본군을 탈출해서 영국군에 투항했고, 일본군 포로가 아닌 조선인으로 연합군 편에서 무슨 일인가를 하고자 했던 요구가 받아들여져 두 사람은 미국으로 보내졌다. 그래서 그들은 그 혹독한 OSS 첩보요원 훈련을 밤낮없이 3개월간을 받았고, 미 지상군의 한반도 상륙을 위한 전초작업 임무를 띠고 침투되려는 즈음에 일본땅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이다.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훈련지 산타 카탈리나 섬을 떠나면서 그들은 OSS 첩보요원에서 포로 신세로 바뀌어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던 것이다. [비크스탭 미육군대령] "여러분,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여러분을 이렇게 취급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는 일개 육군 대령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한테는 분명 특별조치가 취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정부와 정부 사이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특별 취급해서 인계하려고 해도 여러분을 인수할 기관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나라에는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포로 취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는 논리의 모순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당장 정부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그들로서는 그 논리에 순응해야만 그나마 귀국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더 따질 수 있는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본인의 말마따나 일개 육군 대령에 불과한 OSS 훈련책임자 비크스텝을 붙들고 백번 천번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참으로 엉뚱한 곳에서 나라 잃은 서러움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껴야 했다. 학병에 끌려나가면서도, 미얀마의 정글 속에 동료의 무덤을 계속 파면서도, 후퇴하는 자동차를 쫓아오며 경상도 사투리로 부르짖다가 끝내 길바닥에 나둥그러지던 정신대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나라 잃은 서러움이 그렇게 기막히지는 않았었다. 기대하지 않은 자에게 받는 핍박보다 기대했던 자에게 당하는 배신이 열 배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은 계기였다. 인천항에 내려진 포로들은 미군의 명령에 따라 체조대형으로 양팔들을 벌리고 섰고, 바닷바람이 몰아쳐오는 1월의 추위 속에 모두는 발가숭이가 되어야 했다. [OSS 박두병] "범우, 자네 꼬치가 춥다고 허네." 박두병은 허허대고 웃으며 말했고, [김범우] "내 꼬치야 상관없네만 자네 꼬치나 얼지 않게 허소. 당장 일 시켜 얄 것 아닌가." 김범우는 이미 장가를 간 박두병을 상기하며 대꾸했고, 두 사람은 발가벗은 채 찬바람 속에서 허허한 웃음을 허허로운 허공에다 뿌리고 서 있었다. 세 번째의 명령에 따라 발가숭이 포로들은 왼쪽에 줄 맞춰 놓여진 옷가지 앞에 하나씩 서야 했다. 그건 헐고 때묻은 일본군의 옷이었다. 결국 수송선을 타기 전에 하와이에서 얻어 입은 미군 옷은 하나도 남김없이 반납한 셈이었다. 김범우는 그것이 차라리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랐다. 기억마저도 그렇게 깨끗하게 잊혀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김범우가 군정청을 다녀온 다음부터 자신에 관한 소문이 가마니 속에서 썩는 홍어 냄새 풍기듯 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두문불출한 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염상진이 찾아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가 밤이 아닌 대낮에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 김범우로서는 기뻤다. 염상진이 보여준 끈질긴 항일정신은 어느 모로나 값지고 존경할 만한 것이었다. [염상진] "요새 떠돌아댕기는 소문은 어찌 된 것인가?" 서로의 문안인사가 끝나자 염상진이 가려운 데를 못 참고 긁 듯 물어 온 말이었다. 김범우는 염상진이 찾아왔을 때 벌써 그의 궁금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염상진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아마 그 소문이 아니었으면 염상진은 결코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것임을 김범우는 알고 있었다. 자기가 그렇게 반대한 학병을 지원한 자의 무사 귀한을 축하하기 위해 시간을 버릴 만큼 염상진은 배알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김범우] "소문에 얼마나 살이 붙었는지는 모르지만 군정청 통역관 자리를 거절한 건 사실이오." " [염상진] 그거 참 잘한 일이네. 자네가 왜 미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 노릇을해." 염상진의 목소리는 갑자기 열기를 띠었다. 김범우는 그 말투에서 짙은 정치 냄새를 맡았다. 해방과 더불어 염상진의 의식이 어느 방향으로 돛을 올렸는지 직감을 할 수 있었다 . [김범우] "미 제국주의자들 이라니요? 듣고 보니 묘한 기분이 듭니다?" 김범우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염상진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김범우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자신이 통역관을 거절한 사실을 염상진은 아전인수 식으로 확대 해석하려 하고 있었다. [염상진] "기분 묘할 것 없네. 마땅찮아서 그리 부르는 것뿐이니까." 염상진은 태연함을 꾸며보이며 대꾸하고는, [염상진] "그런데, 소문은 그것만이 아니고 또 있던데..." 염상진의 오기는 김범우의 시선을 맞받아내며 말머리를 돌렸다. [김범우] "더 무슨 소문이 있던가요?" 김범우는 지루함을 느끼며 담배를 빼 들었다. 소년적 호기심처럼 염상진이 정치의식에 기울어 있는 성급한 태도가 싫었다. [염상진] "자네 앞에서 소문을 내 입으로 되씹을 필요는 없을 것이고, 일본군으로 학병을 나간 자네가 어떻게 미국에서 귀국을 했는지, 그걸 알고 싶네." 김범우는 짜증스러움을 느꼈다. 아버지께도 몇 마디로 간추리고 말았던 이야기였다. 김범우는 학병을 끌려나가면서 만주 쪽으로 배속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곳에는 독립군이 산재해 있고, 땅이 넓어서 탈주에도 용이할 것 같았던 것이다. 꼭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일본군이 안되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범우] "뭐,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미얀마에서 탈출해서 영국군에 투항했고, 일본군 포로로 수용소에 갇히기 싫어 연합군 편에서 무슨 일이라도 하려고 했고, 그러다 보니 미국까지 굴러간 거니까요." 김범우의 입 언저리에는 자조적인 웃음이 물려 있었다. [염상진] "그래, 미국에서는 무슨 일을 했든가?" 염상진은 눈을 빛냈다. [김범우]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요." 김범우는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그리고 금방 후회했다. 염상진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염상진] "자네, 아무말도 허기 싫은 모양이구만. 딱 한 가지만 대답하게. 소문에 첩보요원 훈련을 받았다는데, 사실인가?" 김범우는 담배를 비며 그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염상진] "범우, 내 경솔을 용서하게. 자네 깊은 속 모르고 학병 나간다고 그리 타박을 했으니. 자네는 큰 애국을 한 것이네." 염상진은 촌스러울 만큼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염상진을 김범우는 허망한 마음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염상진] "자네가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첩보요원이 된 것을 이제 와서 딴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미군의 흉계에 걸려들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일이야. 자네는 그것으로 또 한번 커다란 애국을 한 것이네." 염상진의 말은 금방 다른 채색을 하며 상기되어 있었다. 김범우는 그대로 들어 넘길수 없는 감정의 가시가 걸림을 느꼈다. [김범우] "말마다 애국, 애국 하는데 괜히 과대하게 의미 부여하지 말아요, 속 느글거리니까. 그리고, 미군의 흉계에 걸려들지 않은 게 애국이라고 했는데,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요?" 김범우는 표나게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그는 자신의 말이 염상진의 속을 얼마나 긁을지를 잘알고 있었다. [염상진] "미국 놈들은 우리나라를 망치려고 온 놈들이야!" 염상진은 마치 구호를 외치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범우] "그럼, 우리나라를 흥하게 하려고 온 사람들이 따로 있단 말이오?" 김범우는 말을 하면서, 내가 왜 어린애 장난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나 싶었다. 그러는 김범우의 얼굴에는 경멸적인 웃음이 드러나 있었다. [염상진] "사회주의 건설만이 그 길이야!" 염상진은 부르르 떠는 몸짓을 하며 마침내 깃발을 세우듯 그 말을 부르짖었다. 그런 염상진의 눈은 묘한 광채로 타오르고, 입술은 응등 물려 있었다. 그건 이미 하나를 신념으로 선택해버린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김범우는 대화의 단절을 느낌과 동시에 짙은 피로감에 싸였다. 형용하기 어려운 서글픔이 자욱하게 가슴을 덮어왔다. 그건 하룻밤 사이에 포로 취급을 당해 잠 못 이루며 바라보았던 벽과 그 어찌 할 수 없던 외로운 체념이 불러오던 서글픔이었다. [김범우] "좋아요, 어떤 주의를 따르든 그건 개인의 자유지요. 그러나, 그것이 곧 민족 전체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성급한 판단은 금물입니다. 미국이다, 소련이다,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사회주의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정치적 택일이 아닙니다. 그건 한민족이 국가를 세운 다음에나 필요한 생활의 방편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민족의 발견입니다. 그 단합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해요." 김범우는 이마에 돋은 식은땀을 닦으며 말을 마쳤다. 결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치닫고 있는 염상진을 보자 그 말만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염상진] "자네 말은 아주 그럴 듯해 보여. 그러나 그건 부르주아적 환상이야." [김범우] "아니 그게 무슨말입니까? 미.쏘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그들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긴가 이념인가 하는 것에 놀아나 민족이 서로 갈라져서는 안된다는 뜻인데, 그게 부르주아적 환상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염상진] "우리에게 해방은 곧 인민혁명이야. 해방은 곧 새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고, 그 시작은 인민혁명을 통한 새 나라의 건설부터네. 그런데 자넨 시대역행적으로 케케묵은 민족이나 찾고있지 않느냔 말야." [김범우] "그렇게 속단하지 마세요. 민족이라고 하니까 핏줄만을 중시해서 어중이떠중이 다 싸잡아서 말하는 민족인 줄 압니까? 현시점에서 친일 반역세력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어요. 그런 부류들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서 절대다수의 민중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집단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굳이 '민족의 발견'이라고 했어요. 형은 그게 바로 인민 혁명세력의 규합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닙니다. 그 민족에는 일체의 정치성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아니,더 확실하게 말해 그 민족 아래 모든 정치이념들은 단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국과 쏘련에 점령당해 있기 때문입니다. 미.쏘는 자기네들 이익추구를 위해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는 훼방꾼들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갈려 이념을 먼저 선택하면 우리 민족은 결국 분열밖에 할 게 없다 그겁니다." [염상진] "그런 민족개념이라면 내가 경솔했네. 그러나, 자넨 현실을 제대로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훼방꾼은 미국일 뿐이데, 미국이 아무리 훼방을 놀려고 해도 그건 헛고생이네. 친일 반역자들을 빼놓고는 모두가 혁명세력이고, 거기다 또 쏘련이 있는데 미국이 무슨 수로 힘을 쓴단 말인가." [김범우] "참 속편하고 간단한 생각이군요. 형은 정말 쏘련이 우리의 해방과 혁명을 돕는 우리 편이라고 믿습니까?" [염상진] "그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린가! 일정 때부터 쏘련만큼 우리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관심쓰고 도와준 나라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김범우] "과연 그럴까요? 내가 두 가지 사실만 지적해 볼께요. 첫째는 신탁통치 결의고, 둘째는 미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탁통치라는 건 미국이 혼자서 결정한 일입니까? 그건 엄연히 쏘련이 두 개의 제국주의 국가와 나란히 앉아 작당하고 야합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장소까지 모스크바에서. 우리나라를 먹이로 놓고, 제국주의자들과 서로 이익을 분배하고 있는 쏘련의 처사가 과연 옳은 것입니까? 그런 쏘련이 어찌 우리 편일 수 있습니까?" [염상진] "그것이야말로 자네가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쏘련의 전력 전술이야." [김범우] "그래요? 철저한 그들의 대변자로군요.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를 보지 말고,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을 보려고 노력해보세요. 그럼 그 모순과 허위가 보일 겁니다." [염상진] "자넨 생각이 너무 많이 변했구만. 미국 물을 먹어서 그런가?" [김범우] "비꼬지 말고 내 말 마저 들어보세요. 둘째로 미군정이 인공을 부인했는데, 그게 미국이 현실적으로 힘을 쓰지 못해서 취한 처삽니까. 그건 곧 자기네 점령지구에서 공산주의를 부정한 것이고, 혁명을 부정한 것입니다. 이래도 미국이 힘을 못 쓰는 겁니까?" [염상진] "그건 군정이 일방적으로 취한 만행이지 우린 그걸 인정하지도 않고, 부인 당하지도 않아. 우린 그 만행을 분쇄하기 위해 계속 투쟁을 전개하고 있어." [김범우] "예,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행동통제를 받지 않는 포로로 특별취급을 받으며 수용소에서 내가 한 일이 뭔지 압니까? 미.쏘의 세계전략에 관한 책들과 논평들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얻어진 것은, 미국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고, 쏘련은 그에 못지않은 공산주의적 패권주의라는 사실입니다. 그 두 개의 어마어마하게 큰 발에 짓밟히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땅과 우리 민족입니다. 이런 상황을 직시할 때 우리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우리끼리 이념 대립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단합 아래 하나로 뭉치는 거라는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겁니다. 이게 헛소립니까?" [염상진] "지름길을 두고 돌아갈 건 뭔가. 오늘 얘기로 자네가 사회주의를 버렸다는 사실만을 확실히 확인했네. 자네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허황한 것인가를 곧 알게 될 거네. 미국이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역사의 필연적인 흐름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네. 누구 말이 맞나 두고 보세." 염상진은 일어섰다. 김범우는 염상진을 올려다보았다 . 염상진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린 것 같았고, 김범우의 얼굴에는 쓸쓸함만이 머물러 있었다. [김범우] "이제 학교로 돌아가는 게 어떻소?" 김범우는 잠꼬대를 하듯 말했다. 김범우는 자신이 분명 잠꼬대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염상진과 함께 사회주의를 논했던 먼 기억이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은 순천중학을, 염상진은 광주사범을 다니며 보낸 세월이 이젠 전설처럼 먼 이야기였다. 염상진이 이대로 떠나면 그때의 우정까지 영영 두 갈래로 벌어지고 말 것 같은 어두운 예감 때문에 김범우는 엉뚱한 말을 한 것이었다. [염상진] "범우 자네 맘 내가 다 알어. 허나, 나는 자네하고는 피가 다르네." 염상진은 중얼거리듯 이 말을 남기고 급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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