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2장 …. 가슴으로 이어진 물줄기
등잔 불꽃이 그을음을 긴 꼬리로 남기며 가물가물 타고 있었다.
등잔 불빛은 온기 없는 반딧불처럼 허전하고 미약했다.
그 불빛은 세 사람이 넉넉하게 자리잡기에도 비좁은 느낌의 방안 어둠을 사르는 것도 힘겨운 듯싶었다.
등잔 주위만 가까스로 밝혀졌을 뿐
천장 구석구석에는 묽은 어둠이 그대로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불빛마저 새어나가는 것을 저어 했음인지
지게문에는 남루한 이불이 무겁게 쳐져 있었다.
미동도 없이 바짝 쪼그리고 앉은 세 사람은 돌덩이었고,
어둠을 이겨내지 못하는 미약한 불빛은
그들 세 사람의 그림자만을 터무니없이 크고 진하게 찍어 내고 있었다.
그들의 그림자는 세 벽을 가득가득 채운 채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괴물스럽게 일렁이고는 했다.
늪처럼 잠겨드는 방안의 침묵은 무슨 견고하고 무거운 물체처럼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윗목에 앉은 하대치는 큼큼 밭은기침을 만들어내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자정이 넘어가고 있을 것이고, 언제까지 그렇게 앉아 있을 여유가 없었다.
하대치의 그런 몸짓의 의미는*
두 사람에게 전류보다 빠르게 전달되었고,
전등에 반짝 불이 켜지듯 확실한 반응이 나타났다.
아랫목에 앉은 노인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방바닥에 놓인 곰방대를 더듬더듬 주워들었다. 그 손이 완연하게 떨리고 있었다.
노인의 옆, 반닫이를 등지고 앉았던 여자는
꺽어세운 무릎을 더 단단히 가슴팍으로 끌어 안 듯 하면서
윗목의 하대치에게로 눈길을 쏟아부었다.
눈물로 젖은 그 눈길에 두려움과 초조가 엇갈리고 있었다.
[하대치아버지 판석영감] "그려..."
노인은 힘겹게 말을 꺼내놓고는
목이 타 드는지 삐쩍 마른 목을 길게 빼듯이해서 침을 삼키고,
[하대치아버지 판석영감] "가먼 워디로 갈 것이다냐?"
안타까운 듯이 물었다. 하대치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방바닥을 내려다본 자세 그대로 한참을 앉아 있다가 마지못한 듯 대꾸했다.
[하대치] "지도 잘 모르겄구만이라."
자식의 정이라곤 명주 실오라기만큼도 느낄 수 없는 그 무뚝뚝한 말을 듣자,
니가 모르먼 고걸 누가 알 어, 하는 호통이 목고멍을 치받쳐 올랐지만
판석 영감은 어금니를 깨물며 말을 억눌렀다. 그건
앞에 앉은 것이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듣던 옛날의 자식이 아니라는 슬픈 확인이었고 절망적인 체념이었다.
그려, 자석은 품안엣적 자석이 자석이제 몸 크고 생각커서
품 벗어나불면 지 자석이 아닌 벱이여.
옛말 이른것이 틀린디가 하나또 웂어.
한사코 아래로만 쏟아져내리는 부정(父情)의 물줄기를 그만 돌려야 된다고 생각하며
판석 영감은 스스로를 다스리려고 애썼다.
아들을 향한 체념을 가슴에 심기 시작한 것이 결코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스무 살 나이가 가까워질 임시부터였으니까
아들의 열받친 행동거지는 일정(日政) 때부터 시작되어 *이미 십 년이 가까워 있었다.
일본인 지주한테 대항해서 소작쟁의를 벌이면서
아들은 가도가도 목마르고 허기진 소작농군의 길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일반 소작쟁의도 삭신 녹아내릴 매타작에 콩밥신세가 확연한 죄로 정해진 세상에서,
일본인 지주를 상대로 한 소작쟁의가 어떤 결과를 부를지는 너무나 빤한 노릇이었다.
그것은 맨주먹으로 닛본도 휘두르는 순사한테 덤벼드는 것이나 진배없었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성미 급한 나방이나 다를 바 없었다.
피걸레가 되어 내던져진 아들을 업고 집으로 돌아오며
판석 영감은 제 살이 찢겨나가는 아픔에 떨며 울었고,
차라리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 목숨의 구차함이 비통해서 울었다.
축 늘어진 아들을 수십 번 추슬러 업어가며
판석 영감은 피물림하듯 대대로 이어진 소작농의 비애와 운명을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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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물리는 가난이라는 것처럼 무서운 죄가 없었고, 견디기 어려운 벌이 없었다.
아들은 그 죄를 타고나서 이제 철든 나이가 되면서 그 벌을 받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대치] "아부지, 지발 암 말도 마씨요. 목심내걸고 독립운동허는 사람들도 있는디,
뺏긴 지 밥그럭 찾아묵는 일도 못헌다먼 고것이 무신 사내 새끼다요.
그라고 우리가 허는 짓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도 다 알고 있당께요.
그려도 허고허고 또 혀야지라. 작인 없는 지주눔들도 웂는 법잉께요."
몸져 누운 아들의 눈빛은 매타작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소견 멀쩡함에 판석 영감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아들이 마음을 단단히 먹을수록
몸은 멍든 옹기가 되어가다가 끝내는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말리라는 불안감이
먹구름으로 가슴을 덮고 있었다.
나흘째 되는 날 순사가 들이닥쳤고,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새운 아들은
다음날로 기차에 떼밀려 실려졌다. 징용으로 끌려가는 것이었다.
아들과 함께 쟁의를 벌였던 소작회의 다른 열두 명도 함께였다.
[하대치 아버지 판석영감] "열분 백분 참고 또 참어야 쓴다.
목심지키는 일이 젤 중헌 일잉께. 홀몸 아닌 니 시악씨 생각혀서라도 몸 성히 돌아와야 써. 애비 말 명심혀, 알아듣겄냐?"
판석 영감은 아들의 소매를 잡아 흔들며 애타게 말했지만
아들은 아무것도 없는 하늘 그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들은 순사에게 등을 떼밀려 기차에 오르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해도 말 한마디 없었다. 말은 고사하고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떠나가고 말았다.
기차가 산굽이를 돌아갈 때까지
맞바람이 통하는 가슴으로 서 있던 판석 영감은,
아 저것이 옛날 자식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고,
그 최초의 깨달음은 아들이 자신에게 한정도 없이 멀어져가는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장성한 자식의 모습을 확인하는 대견함도 있었지만
그러나 자식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허전한 상실감이 주는 슬픔이 더 컸다.
**그것은 자신의 가슴 저 밑바닥에 깔려 있는
씻겨지지 않는 죄의식이 고개를 드는 탓인지도 몰랐다.
[판석영감 부친 ] **그려, 다 이 못난 애비 죄여. 이 애비 원망을 속 풀릴 때꺼정 혀.
근디, 불쌍헌 내 새끼야 니 팔자는 애비를 원망한다고 풀리는 것이 아녀.
피 타고남스로 매듭매듭 맺힌 한(恨)인디, 고걸 워째야 쓸끄나.
한은 맺히기만 했지 풀리는 것이 아님께 한인 법인디,
고건 풀라고 발싸심허먼 헐수록
헝클어진 실꾸리맨치로 얽히고설키다가 종당에는 지 명(命)꺼정 끊어묵는 법인다……
판석 영감의 뇌리에는 아버지의 기억이 예리한 아픔으로 찡하게 떠올랐고,
그 기억을 몰아내듯이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기차가 사라져간 산굽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판석영감] "요리 밤 중 채비럴 혀야 헐 만치 헹펜이 다급허게 되얐냐?"
판석 영감은 굳이 대답을 듣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아들에 대한 일종의 힐책이었다.
예끼 숭헌 눔덜아,
열흘을 못 채우고 요리 야반도주럴 헐 신세밖에 못 돼묵은 것들이
그리 험허게 사람들 목심을 해치다니, 천하에 몹쓸놈들.
판석 영감은 이런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아들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무지 자신의 자식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변해버린 아들을
판석 영감은 침침한 불빛 속으로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북해도 탄광으로, 여기저기 비행장을 닦는 데에 5년여를 끌려 다니다가
해방과 함께 돌아온 아들은 이미 마음이 변해 있었다.
판석 영감은 그 사상에 깊이 물든 아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 물불을 가리지 않는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판석영감] "그려, 형편이 다급허먼 떠야제..."
판석 영감은 *입을 가리고 잔기침을 하고는,
[판석영감] "인자 떠나먼 살아 니럴 다시 볼란지 몰르겄다."
목소리가 잠겨들었다.
[하대치] "고것이 무신 말씸이다요?"
하대치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판석영감] "아녀, 그냥 허는 소리여. 내 나이 생각허고 그냥 허는 소리여."
판석 영감은 예사로운 듯이 말하며 아들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 감았다.
[하대치] "오래 안 걸릴 것이구만요. 금방 되짚어올 것잉께 아무 걱정 마씨요."
아들은 낮은 음성이었지만 다부지게 말했다.
그러나 판석 영감은 전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나라가 금하는 일을, 그것이 제아무리 옳고 바르다고 해도
나라와 맞서 이기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판석 영감이 칠십 평생을 통해서 겪어온 경험이었다.
동학란이 그러했고 일정때의 독립운동이 그러했다.
[판석영감]** "니는 이름땜 허니라고 그리 드세게 사는갑다. 큰 대에, 다스릴치,
애시당초 가당찮은 이름이었제. 느그 할아부지의 택웂는 욕심이었는디,
고 이름을 그대로 붙인 나가 더 큰 잘못을 저질른 것이여..."
[하대치] "쉿!"
하대치는 판석 영감의 말을 제지하며 문 쪽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그리고 한 쪽 귀에 손바닥을 오목하게 만들어 붙이고 밖으로 신경을 모았다.
그때 밖에서 이름 모를 새소리가 2번 들렸다.
하대치는 잽싸게 문에 쳐진 이불을 약간 들치고 신호를 보냈다. 풀꾹, 풀꾹.
그건 의심할 여지없는 풀꾹새 소리였다.
하대치는 튕기듯 일어섰다.
그때까지 돌덩이처럼 앉아 있던 여자가 따라 일어섰다. 하대치의 아내 들몰댁이었다.
[하대치] "갈 길이 급헌께 나서지 말어. 불 끄고."
하대치는 먹물 같은 어둠 속에다가 불쑥 이 말을 던지듯 하고는 방문을 차고 나갔다.
그가 토방으로 내려서는데 헛간 쪽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마당을 가로질러왔다.
**그들의 등에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 짐이 매달려 있었다.
하대치] "싸게 뜨세."
하대치는 낮게 말하며 그들의 앞장을 섰다.
그들은 사립문을 버리고 집을 끼고 돌아 어둠이 밀집해 있는 대숲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빠른 걸음을 옮기는데 따라 바닥에 쌓인 대이파리와
죽순껍질들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대숲의 농도 짙은 정적을 흔들었다.
[하대치]** "사태가 워찌 돼가는고?"
하대치가 대숲을 벗어날 즈음에 입을 열었다.
[그림자] "주력부대가 깨져부렀다매요."
뒤따르는 그림자의 침울한 대꾸였다. 그리고 그들은 더 말이 없이 키를 낮춰가며 길을 피해 동네를 벗어나고 있었다.
판석 영감은 곰방대에다가 꽁꽁 담배를 재었다.
성냥을 죽~~그어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그때까지 윗목에 그대로 서 있는 며느리를 의식했다.
[판석영감] "아가, 인자 이불 걷어내고 건너가서 눈 잠 붙이거니라."
판석 영감은 며느리에게 미안하고 면목이 없어 이 말조차 하기가 거북스러웠다.
며느리는 소리없이 문에 쳐진 이불을 걷어냈고, **조심스럽게 문을 밀치며
[하대치의 아내 들몰댁] "아부님, 주무시씨요" 하고는 방을 나섰다.
그 음성이 어느 때 없이 풀죽고 물기 젖어 있어서
판석 영감은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잘 자라거나 편히쉬라고 했겠지만 지금의 정황으로는 전혀 필요한 말이 아니었다.
판석 영감은 벽에 등을 부리고 앉아 곰방대를 뻑뻑 소리나게 연거푸 빨아댔다.
그리고 담배연기를 가슴속 깊이깊이 빨아들였다. 올올이 맺힌 회한과
주체할 수 없는 서러움으로 미어질 것만 같은 가슴을
담배 연기로나마 적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판석 영감은 원래 벌교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고향은 나주였다.
** 그의 아버지는 나주벌의 대지주 송진사댁의 대를 물리는 가복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가복이라는 미천한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글을 깨치고 있었다.
그건 신분에 씌어진 금기를 파괴하는 위험스런 일이기도 했다.
물론 글을 깨쳤다고 해보았자 천자문을 막히지 않고 윌 수 있고,
땅바닥에다 획 틀리지 않고 쓸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가복의 처지로서는 그 정도만으로도 대단한 학식을 갖춘 셈이었고,
더군다나 천자문을 깨친 것이 순전히 어깨너머로 귀동냥 눈동냥 한 결과였다는 것은
그의 타고난 총명이 어느 정도인지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하대치할아버지] "이눔아, 종눔 신세에 설 깨친글 아는게 우환 불러들이는겨.
꿈에라도 글 아는거 티내지말어. **고것이 명 재촉허는 길잉께."
그의 할아버지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얼굴로 아들에게 못박고는 했다.
그런데 그의 할아버지의 우려는 마침내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남몰래 동학사상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고,
동학도의 분노가 행동으로 불붙기 시작하자 그는 그 불씨의 하나로 정체를 드러냈다.
그의 아버지는 가복의 사슬을 스스로 끊고 동학의 선봉물결이 되었다.
[하대치 할아버지] "이눔이 기어코 일얼 저질러 뿌렀구나. 이 일을 워째야 쓸꼬, 이 일얼..."
그의 할아버지는 안절부절못하고 나날을 보냈다.
새끼를 어떻게 단속했길래 그 꼴이 되도록 몰랐느냐고,
** 꼴도 보기 싫으니 눈앞에 얼씬 거리지도 말라는 송 진사의 노발대발한 호통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어깻죽지를 잔뜩 웅크리고 기가 꺾여 지내면서도 바람 탄 불길처럼 번지고있는
동학도의 기세에 속으로는 열렬한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그건 결코 아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기왕 터진 봇물이었고, 동학이 이기는 것만이 자기네 같은 가랑잎 신세들이 사람답게 살아볼 수 있는 길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동학도의 피흘림은 곪고 곪은 고름이 터진 것이라는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급기야 송 진사가 피난 짐을 싸지 않을 수 없게 동학의 기세는 뻗어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길게 가지는 못했다.
청국과 일본 군대가 서로 다투어 관군을 대신해서 동학군과 맞서게 되면서부터
전세는 일변하기 시작했다.
동학군은 곳곳에서 패배했고,
흰 무명옷에 피범벅이 된 동학도들의 시체가 아무데나 나뒹굴기 시작했다.
동학군이 뿔뿔이 흩어져 산중으로 패주했고,
그와 반대로 산중 어느 절로 피난을 떠났던 송 진사네가 돌아왔다.
송 진사의 서슬은 예전과 다르게 시퍼런 날을 세우고 있었다.
아랫것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기 위함일 것이었다.
송 진사네는 인명의 피해는 입지않았지만 재산의 피해는 적잖이 입고 있었던 것이다.
행랑채에는 어느 때 없이 썰렁한 바람이 감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잠을 자다 말고 그는 할아버지와 함께 사랑채로 불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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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대치 할아버지] "인자 내쫓기는 갑다."
그의 할아버지는 사랑채로 통하는 문을 넘어서기 직전에 한숨을 토했다.
그 한숨이 어찌나 깊고 진한지 할아버지의 기운이 모두 뽑혀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사랑채 마당에서는 덕석말이 매타작이 한창이었다.
매타작을 얼마나 당했는지 둘둘 말린 덕석 안에서는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송진사] ** "저눔이 인자 오는구나. 고만 덕석 풀어라!"
마루에 버티고 선 송 진사가 그의 할아버지를 손가락으로 겨냥하며 소리쳤다.
덕석을 동여맨 새끼줄이 낫으로 끊기고, 두 사람이 둘둘 말린 덕석 끝을 치켜듦과 동시에 덕석은 추르르 펼쳐져나갔다.
그 속에서 드러난 것은 피투성이가 된 그의 아버지였다.
[하대치 할아버지] "진사 나으리, 살려주씨요."
그의 할아버지는 울컥 피를 토하듯 울부짖으며 피범벅이 된 아들의 몸을 덮쳐 안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미 숨이 끊긴 뒤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의 할아버지는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다음날 새벽 그는 아버지의 시체를 가마니쌈해서 지게에 짊어져야 했고,
하룻밤 사이에 10년살이를 해버린 것처럼 변한 할아버지는
흡사 허깨비처럼 휘뚱거리며 지게 뒤를 따라왔다.
그의 아버지 나이 서른넷이었고, 판석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송진사]** "전라도땅에서 누구 땅 얻어부치고 살 가당찮은 생각 묵지를 말어라.
느그눔덜은 머슴살이도 못해묵게 맹글것이다.
산골짝에 들어가서 솔잎이나 뜯어묵고 살어.
요리 사대육신 멀쩡허게 내보내는 것만도 큰 은혜 입은 줄 알어야 헐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다섯식솔을 거느리고 쫓겨난 맨주먹의 할아버지는
온 하루를 말 한마디 없이 땅만 내려다보고 걸었다.
해가 뉘엿뉘엿해서 어느 개울가에서 보리밥 뭉치를 풀었다.
눈앞에는 숲이 깊은 산이 다가와 있었다.
그때부터 산 골짝골짝을 타넘는 화전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을 하려고 기를 썼지만 무슨 중병이라도 깊이 안은 듯
식은땀만 쏟을 뿐 기운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벙어리가 되어버린 듯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찌어찌 1년을 살아내고 그의 아버지 제삿날이 찾아왔다.
[하대치 할아버지] "양반, 고 숭악헌 눔덜. 쇠포리맹키로 징허고 징헌눔덜."
그가 제상에 절을 하고 물러섰을 대 할아버지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건 할아버지가 실로 일 년 만에 처음으로 한 말이었는데,
할아버지는 그 말을 칡뿌리를 질겅질겅 씹는 것처럼 했던 것이다.
그는 섬뜩한 기분이 들어 얼른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는 향이 타오르는 푸른 연기를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상하다 싶게 주름살투성이의 여윈 볼이
심하게 씰룩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결국 앓아눕더니 며칠 만에 숨을 거두었다.
[하대치 할아버지] ** "요건 니 애비가 동학 따라 집 떠남스로 할애비헌테 냄긴겨.
나가 살아서 니 아들헌테 붙여줬어야 헐 이름인디, 앞자가 큰 대자,
뒷자가 다스릴 치자라고 혔다. 고것이 느그 애비가 생전에 품은 한스런 맴이었는디..."
'대치'라는 두 글자는 한지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골골 병을 앓는 할머니는
살아 생전에 고추 달린 증손자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을 무슨 타령 읊조리듯 했다.
할메 소원 풀고, 일손도 하나 더 벌어들인다 셈치고 같은 화전민의 딸과 결혼했다.
그 고추 달린 아들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연이어 딸 둘을 낳았고,
할머니는 기다리기에 기진했는지 어느 날 문득 눈을 감고 말았다.
염치도 없이 딸은 그 뒤로도 둘이나 더 불거졌다.
별다른 산고도 치르지 않고 애를 낳은 마누라의 암팡진 엉덩짝이 부실할 리는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부실한 것은 씨 쪽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의 마음은 한결 초조해졌고, 크게 다스린다는 뜻의 그 이름을 영영 써먹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방정맞은 생각이 불쑥 일어나고는 했다.
아들은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참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고, 늦은 나이에 구경하는 고추였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너무 당연하게 '대치'라고 이름 붙였다.
그 뜻이 사내다운 이름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냄새를 역연히 맡을 수 있어 좋았다.
이름을 따라 아들이 어떤 큰 인물이 될 것 같은 알큰한 예감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산짐승이나 다름없이 산골짝이나 타넘는 화전민 신세라는 자각 앞에서
그는 한없이 초라한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아버지로서의 책임 같은 것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고는 했다.
드문드문 구경하는 세상이어서 그런지 그 동안 세상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나라 주인이 바뀐 것 이었다.
산을 타넘으며 거처를 옮기다 보니까 백운산을 거쳐 조계산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산채 말린 것을 한 지게 가득 지고 쌍암장에 나갔다가 벌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중도라는 일본인이 포구에 이십 리가 넘는 방죽을 막아
논을 만드는 간척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대대적으로 사람을 모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조건이라는 것이 귀에 솔깃했다. 노임은 따로 지불하고, 공사가 끝나면 소작 논을 우선적으로 배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국밥이 식는 줄도 모르고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방죽 쌓는 노동이 제아무리 힘들다 한들 화전 일구는 것보다 더 하진 않을 것이고, 논농사를 짓게 되면 화전처럼 새 밭을 일굴 필요가 없고 떠돎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도 그의 마음을 더욱 달뜨게 하는 건
아들을 산속에 처박아 산짐승처럼 키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전깃불이 번쩍번쩍하는 읍사무소가 있는 곳, 아니 양반이고 상것의 차등을 두지 않고
글을 가르치는 학교라는 것이 있는 곳, 그런 별천지에 뿌리내리고 살면서 아들을 사람답게 키우고 싶었다.
상것들도 당당하게 글을 배울 수 있게 된 그 동안의 변화가
그에게는 나라 주인이 일본인들로 바뀐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몇 년 전이면서도 그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벌교로만 나오면 아들 대치도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주모가 일깨워서야 국밥을 마구 퍼넣다가 그만 가슴이 컥 막혀
주먹으로 가슴팍을 퍽퍽 두들겼다.
매운 눈물이 삐쭉 배어나온 눈앞에 어린 대치의 방싯거리는 모습이 어릿어릿 떠올랐다. 그는 마디 굵은 손으로 눈을 씩 훔치면서 헤벌쭉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뒤따라 그리도 암담하고 캄캄한 마음으로 산으로 들어갔던 것과는 반대로 겨드랑이에서 날개라도 돋치는 듯 곧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산을 등졌다.
그러나 그는 깊은 마음까지 들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목숨이 한세상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팍팍한 것인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한 마리 황소이거니 생각하고 닥쳐올 고난을 이겨낼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참으로 한 마리의 미련하고도 끈질긴 황소처럼 그는 공사장 일을 이겨나갔다.
아들 대치가 무병하게 커가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고 빛이었다.
그는 담배는 피웠지만 술은 가까이하지 않았다. 술을 마셔서 될 살림살이가 아니었다. 나날의 생활이 아무리 고되어도 세월은 흘러가는 맛이 있어 살아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저히 가망없어 보이던 방죽 쌓는 일이 시나브로 시나브로 이어져 나가더니 마침내 완성의 날이 온 것이다.
포구를 따라 뻗어나간 장장 20리가 넘는 방죽은 절로 탄복이 터져나올 만큼 장관이었다. 돌덩이를 져나르고, 흙을 퍼나른 모든 일꾼들은 하나같이 그 기나긴 방죽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경이하는 반면 구체적 실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성벽처럼 완강하게 바닷물을 차단시키고있는 방죽은
읍내 심장부와 봉림리를 직결 시키고 있는 소하다리에서부터 동쪽으로 뻗어가기 시작해서 순천만을 향해 차차 넓어져가는 포구 20리를 치달아 호동리 선수머리에 그 꼬리를 대고 있었다.
순천만의 바닷물은 그 방죽을 따라 하루 두 차례씩 횡계다리(홍교) 밑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가 물러가고 하면서 방죽을 쌓아올린 네모난 무수한 돌들을 찰싹찰싹 쓰다듬었다.
방죽위에 닦여진 길은
바다가 밀물이면 밀물인 대로, 썰물이면 썰물인 대로 유난히도 희게 드러나 보였다.
왜냐하면 벌교 포구는 그 바닥이 모래라곤 구경할 수 없을 지경으로 온통 뻘밭이었는데, 그것이 다른 데 것과는 달리 질기고 차져서
한번 발목이 빠졌다 하면 빼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 색깔이 검은색에 가까운 흑회색을 띠고 있었다.
그 위에 바닷물이 밀물져와도 그 색깔이 우중충함을 면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긴긴 방죽 위의 길은 언제나 풀기 싱그러운 옥양목 필을 펼쳐놓은 것처럼 희게 빛났다.
그 방죽이 동서로 팔을 벌려 보듬고 있는 벌판은
회정리 1.2.3구와 장양리에 걸쳐져 끝이 아슴하도록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일정기간 동안 간기를 빼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질펀하게 펼쳐진 땅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불러하고 넉넉해했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였다. 그건 어디까지나 일본인 중도의 땅이었지 그들의 소유라곤 단 한 평도 없었다.
방죽을 막으면서 개통한 다리에 '소화'라는 이름을 붙여도
그 누구 하나 반대를 하지 않았듯이 그 방죽의 이름도 '중도 방죽'이 되었다.
중도의 간척지는 예로부터 경작되어온 북쪽의 낙안고읍 들에 비하면
그 면적으로나 토질로나 비교할 것이 못되었다.
그러나, 고읍들을 첫째로 꼽고,
장좌리와 칠동리에 걸쳐 있는 서쪽의 벌을 두 번째로 친다면
중도의 간척지는 벌교의 세 번째 농토로 손색이 없었다.
“중도”라는 인물은 재산을 다소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런 엄청난 간척사업을 벌일 만큼 큰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 못했고,
그 사람됨도 의롭지가 못했다.
그의 이름을 내걸어 추진된 간척사업의 뒤에는
저 유명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돈줄이 닿아 있었다.
고리대금업으로 축재를 하는 중도가 그런 장기사업에 투자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의아한 점이었고, 또 그런 내막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처음 약속대로 판석 영감은 소작지를 배당받았다. 끝도 없이 허기지고 고달픈 소작농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곁눈질하지 않았고 딴 생각 하지 않았다.
그저 땅만 파고 땅만 다독거렸다. 6할을 지주에게 바치고 나머지 4할에서 농지세, 물세, 비료대, 종자대, 기본소작료 등등을 빼고 나면 뭘 먹고 사느냐고 입 달린 소작인이면 누구나 떠들어 댔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 그런 불평에 동조하지 않았다.
속으로나마 불만스럽게 여긴 일도 없었다.
분명 그런 조건은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어찌할 것인가.
해결이 안될 불평만 서로 씹어 대다가
그 기분으로 술이나 한 잔씩 걸쳐대는 습관을 들이다 보면
농사는 그나마 소출이 줄게 마련이고 생활은 더 꼬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땅만을 믿었고 땅에다 온갖 정성을 쏟아 부었다.
땅은 그에게 남들보다는 다소 나은 생활의 여유를 돌려주었다.
그 여유가 아들 대치를 학교에 보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같은 조건에 처한 남들이 못해내는 일을 자신이 성취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끝없는 긍지와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할아버지. 아버지께도 그 이상 면목이 서는 일이 없을 것 같았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학식을 깨우친다는 것이 병이 되는 것일까.
아들 대치는 그가 소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변해간 것이다.
아버지가 관군을 상대로 한 싸움에 목숨을 내걸고 뛰어든 그 용기는 어디서 생긴것일까. 아들놈 대치가 일본을 바람벽으로 삼고 있는 지주 중도를 상대로 소작쟁의를 벌인 용기는 또 어디서 생겨났을까.
아들놈은 저희들이 하는 일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을 알지만,
하고 또 해야 된다고 했었다. 아버지도 그런 마음으로 동학에 가담한 것일까.
판석 영감은 확연히 잡히지 않는 그런 어릿거림 속에서도
결코 아들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들이 겪는 고초가
아버지로서 안타깝고 가슴 아픈 것이었다.
그런데, 아들은 소작쟁의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이 망했고, 떵떵거리던 중도가 그 넓은 땅을 고스란히 남겨놓고 줄행랑을 쳐버린 마당에 아들은 새로운 싸움을 시작했던 것이다.
동백나무 숲은 어둠이 한결 짙었다. 얼굴을 촘촘히 맞대고 있는
동백나무의 윤기 나는 두꺼운 잎들이 달빛을 야멸하게 막아내는 탓인지 몰랐다.
[염상진] "하 동무, 무사하게 왔구만."
염상진이 하대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신의 손을 움켜잡은 염상진의 손이 부르르 떨었다. 그 과장이 하대치의 심장을 일직선으로 찔러왔다. 그건 단순한 동지애의 표현만이 아니었다. 하대치는 사태가 절망적임을 직감했다.
[염상진] "후퇴 할 수밖에 없게 됐소. 뜨기 전에 수행할 임무가 있소."
염상진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게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무언가를 주저하는 태도였다. 하대치는 그런 것에 신경 잘게 쓰지 않았고,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도 묻지 않았다.
염상진이 위원장 직책을 맡고 있기는 했지만 그도 명령에의해 움직이고 있을 뿐
속시원할 만큼 구체적으로 알리는 없을 것이었다.
[염상진 위원장] "우린 앞으로 투쟁자금이 필요헐 것이오. 그걸 당장 조달해야 되겠소." 하대치의 머릿속에 그 조달방법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그건 염상진의 주저하던 태도가 풀어준 답이었다.
[하대치] "필요허먼 해야제라."
하대치는 염상진의 마음을 북돋는 기분으로 짱짱한 어조로 말했다.
[염상진 위원장] "고맙소. 하 동무."
염상진은 어둠 속에서 약간 웃어 보였다. 하대치는 언제나 염상진을 그런 식으로 대했다.
그건 저절로 우러나오는, 염상진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염상진위원장] "우리는 세사람씩 1개조가 되어 독립운동을 하겠소. 내가 1조, 하 동무가 2조, 강 동무가 3조를 지휘하시오.
하 동무는 서울상회 윤가네럴, 강 동무는 학교 뒤 김가네를, 나는 정미소 최가네를 맡도록 하겠소."
[하대치] "머시냐, 큰 돈 뽑자면 술도가 정가를 빼먼 안될 것인디요?"
하대치는 염상진을 일깨우듯 말했다.
[염상진위원장] "술도가집 아들 정하섭은 우리 동지요."
염상진의 말에 하대치는 그렇구나 싶었다. 정하섭은 읍내가 장악되고 나서 얼핏 다녀갔을 뿐 자신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염상진 위원장] "정하섭 동무를 봐서 술도가집을 빼주는 게 아니오. 우리가 손대지 아니해도 정하섭 동무가 틀림없이 자금조달을 하게 될 것이오."
염상진은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설명을 첨가시켰다.
[하대치] "그렇겄구만이라."
하대치는 염상진의 치밀한 계획에 충분히 수긍이 갔다.
그리고 위원장과 정하섭 사이에는 무슨 연락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다하는 지주로서 화를 면한 것도 술도가집이었다.
잠시 얼굴을 내비쳤던 것이
자기네 집을 다치지않게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하대치의 머리를 뒤늦게 스쳤다.
[염상진 위원장] "작전은 한 시간 이내에 완료하고,
두 시간 이내에 고읍들 끝머리 옥산 입구 서낭당에 집결토록 하겠소.
현찰이나 금반지 같은 것 모두 좋소.
자금조달이 목적이니 절대로 살상은 없도록 하시오. 불가피한 경우를 빼고는.
암호는 전과 동일.
자 출발합시다."
염상진이 흡소리가 나도록 숨을 크게 들이쉬며 일어섰다.
그의 껑충한 키가 어둠속에서 쓸쓸할 정도로 커 보였다.
하대치는 자신보다 곱절은 커 보일 것 같은 염상진의 머리끝을 올려다보며
그는 아무래도 이런 일에만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대치] "조심허시씨요."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하대치는 무심결에 이 말을 하며 몸을 추슬렀고,
[염상진] "하 동무도."
염상진이 하대치의 어깨를 살짝 잡으며 말을 받았다.
하대치는 염상진과는 반대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어둠에 몸을 적시듯 자세를 낮추고 다리에 힘을 모았다.
일순간 그의 몸은 한 덩어리로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그 힘을 분출시켜 노를 젖듯이 어둠의 물결을 헤쳐 나갔다.
그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몸 그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불두덩인지 겨드랑이인지, 위치가 분명하지 않은 몸 어딘가가 근질거리는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키 꺽다리 염상진은 아마 자기와 같은 기분은 아닐 듯 싶었다.
염상진은 큰 키에 비해 싱거운 사람이 아니었다. 맵고 차지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하대치는 염상진 같은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더할 수 없는 기쁨이고 자랑이었다.
하대치가 오늘에 이른 것은 모두 염상진이 끼친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관계를 맺어온 것도 십 년 세월이 넘어 있었다.
사범학교까지 나온 염상진은 하대치의 여백 많은 머릿속에다가 많은 모종을 이식시켰다. 기질적으로 피의 농도가 짙고, 환경적으로 불만요인이 많고,
태생적으로 자학성이 강한 하대치는
그런 나무가 자랄 수 있는 최적의 기름진 토양이었는지 모른다.
하대치는 양질의 화선지였고, 염상진은 솜씨 탁월한 화공이었다.
화공은 유려한 선을 긋고 현란한 채색을 했고, 화선지는 그 물감을 흠뻑흠뻑 빨아들였다.
[하대치] "정지, 쩌그 저 집이다."
하대치는 담 그늘에 바짝 붙어섰다. 윤 부자네 집은 기왓골의 윤곽을 드러낸 채
큰 몸체를 어둡게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 윤 부자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진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었다. 그 눅진눅진한 진땀은 물로 만들어진 땀이 아니라
그가 평소에 포식한 고기의 기름기가 빠져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엄청난 돈을 내놓고 목숨을 애걸했지만 결국은 죽었다.
염상진 위원장] ** "친일도, 포악한 지주 노릇도, 더러운 고리대금업도
다 용서해줄 수 있다 치자. 그 짓을 하고도 살아남길 바라다니, 저 짐승만도 못한 놈!" 위원장 염상진의 처형 결정이 떨어졌다.
윤 부자의 그 짓이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근동 소작인들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는 도저히 갚지 못하게 된 집의 딸을 범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네 처녀에 이르렀고, 그는 범한 처녀들을 소실로도 들어 앉히지 않았다. 그는 난간이 없는 소화다리(해방이 되고 나서
도 사람들은 부용교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를 줄을 몰랐다) 한가운데서 눈을 감아야 했다.
[공산당원] "하 동무, 얼굴을 워쩔께라?"
뒤에서 복면을 하느냐고 묻고 있었다. 하대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아직 읍내는 자신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셈이지만 날이 새면 달라지게 될 것이었다. 단순한 강도로 위장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그 치밀한 염상진이 이 점을 지시하지 않았을까.
그만큼 사태가 위급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하대치는 한 줄기 차가운 긴장이 찌르르 심장을 찔러오는 것을 느꼈다.
[하대치] "싸게 얼굴 개리고, 행동개시."
하대치는 목에 감긴 삼베수건을 풀어 복면을 지었다.
그리고 담 그늘을 타고 앞으로 내달았다.
그의 작달막한 키는 거의 땅에 붙다시피 해서 더욱 작아 보였다. 뒷담을 넘었다.
문 단속은 철저하게 되어 있었다. 변을 당하고 난 다음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대치는 안방 마루도 서슴없이 올라섰다.
뒤 따르는 두 사람이 각기 칼을 들고 마당 쪽을 경계했다.
[하대치] "문 열어, 싸게 문 열어!"
하대치는 격자문을 툭툭 치며 예사 크기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밤의 정적을 큰 파문으로 깨고 있었다. 마당 쪽을 경계하고 있던 두 사람은 그런 돌발적 상황에 화닥닥 놀라며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하대치는 부하들에게 안심하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하대치] "잠깼으먼 싸게 문 열어!"
하대치의 말투는 방안의 동정을 환히 알고 있다는 투였다.
[윤가 마누라] "누, 누군디요?"
하대치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하고 있었다. 문 단속을 그렇게 철저하게 한 사람들이
그 정도의 큰 목소리에 잠을 깨지 않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대치] "요런 밤중에 찾아올 사람이 누군 누구겄어. 싸게 열어."
문고리 벗겨지는 소리를 들으며 뒤를 돌아본 하대치는
두 부하가 복면을 벗어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하대치의 태도를 보고 복면이 필요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대치가 윤가네 식구들에게 노린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빨리 복면을 하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하대치] "빨갱이가 무섭긴 무선 모냥이구만.
말 한마디에 문을 척척 따준 거 보니께. 싸게싸게 돈이고 금반지고 다 껴내여."
하대치는 방으로 뛰어들면서 강도로 돌변했다.
[윤가마누라] "워메 이 일얼 으짤끄나."
윤가 마누라는 칼끝을 피해 벽 쪽으로 밀리며 속았다는 탄식을 물었다.
[하대치] "으짜기는 멀 으째. 싸게 돈만 내."
하대치는 칼을 바싹 디밀었다.
[윤가마누라] ** "금메 말이요. 빨갱이, 빨갱이눔덜헌테 사람 뺏기고 돈꺼정 다 뺏긴거 모르시고 오셨는게라?"
윤가 마누라는 예사 배짱이 아니었다. 목에 칼끝이 닿아있는 경황중에서도
능청스런 거짓말을 꾸며대고 있었다.
그건 돈 많이 가진 자의 탐욕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난 어처구니없는 대담성이었다. 하대치는 그 기름기 많은 굵은 목줄기에 칼을 푹 박아버리고 싶은 신경질적인 충동을 느꼈다.
[하대치] **"요런 잡년, 새살(잔소리)은 무신 쎄빠질 새살이여.
모가지 팍 도려내 뿔기전에 말 들어."
하대치는 칼 끝에 힘을 모아 윤가 마누라의 목덜미를 약간 찌르듯 했다.
[윤가 마누라] "워메, 엄니!"
윤가 마누라는 뻣뻣이 굳어졌다.
[하대치] "인자 푹 쑤셔뿔까!"
하대치는 칼을 휙 소리가 나도록 치켜들었다.
[윤가마누라] "쩌그, 쩌그..."
윤가 마누라는 농 쪽으로 벌벌 기어가며 숨이 잦아들고 있었다.
윤가 마누라가 내놓은 돈은 의외로 적었다.
두 부하에게 농이고 문갑을 다 뒤지게 했지만 금붙이 하나 구경할 수가 없었다.
보나마나 변을 당한 후에 전부 어딘가에 깊이 숨겼을 것이었다.
[하대치] **"야들아, 저 늙은년은 목심보다 돈이 더 중헌 모냥잉께
느그 둘이서맡아 푹푹 쑤셔 죽여뿌러라."
하대치는 차갑게 말했고, 두 부하는 칼을 꼬나잡고 윤가 마누라에게 다가들었다.
[윤가마누라] "숨킨 디 말헐랑께 살려줏씨요. 살려만 줏씨요."
윤가 마누라가 방을 나서 손가락질한 곳은 한 가마 쌀이 들어가는 뒤주였다.
쌀이 반나마 찬 그 바닥에서 돈이며 패물들을 넣은 자루가 나왔다.
하대치는 오 척 반이 될까말까 한 단구였다. 그러나 타고난 뼈대가 굵었고,
어렸을 때부터농사 집일을 거들며 단련된 그의 몸은 옆으로 딱 바라져 있었다.
그의 견고하게 뻗은 어깨와 짱짱하게 버팅긴 두 다리는 한눈에 기운깨나 쓰는 몸으로 보였다. 모계 쪽을 빼박은 체형이었다. 하대치는 소학교 적부터 씨름에 남다른 장기를 나타냈다.
그가 제일 싫어한 운동이 도수체조였다.
그는 운동이라면 싫어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 맨손을 휘휘 젓고 빙빙 돌리고 하는 도수체조라는 것은
춤도 아니고 운동도 아니고 영 시장스러워 할 맛이 나지않았다.
그의 생각에 운동이라는 것은 갈비뼈가 뻑적지근하게 기운을 쓰는 것이라야 했다.
그래서 씨름은 그의 기분에 썩 드는 할 만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는 열일곱 살 때부터 내리 3년을 읍내 장사 씨름대회에 나갔다.
뼈가 실하게 틀을 잡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이기도 했지만
소를 타내는 장사가 되기에는 타고난 키가 너무 작았다.
그러나 하대치의 이름은 소를 탄 장사보다 더 짜하게 알려졌다.
키에 어울리지 않게 기운씀이 놀라웠고, 다양한 기술이 구경꾼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배지기, 옆물치기, 다리후리기 등 못하는 기술이 없었는데 특히 허리치기는 일품이었다. 별다른 기술없이 큰 떡대만 믿고 씨름판에 나선 자들은
하대치의 번개 같은 허리치기에 걸려 공중바퀴를 돌아 쿵쿵 나가떨어졌다.
하대치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씨름대회 출전 3년째 되던 해에
결승전 막판에서 상대방 부자지를 걷어찬 사건 때문이었다.
하대치는 그 상대에게 연속 두 번을 패해 소를 빼앗겼고 다시 3년째 맞붙은 것이었다.
하대치는 그 동안 자신은 뼈도 더 굵어지고 기술도 늘어난 대신
상대방은 그만큼 나이 들었으니, 이번에야말로, 하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샅바를 틀어쥐고 맞붙어보니 형편이 그게 아니었다.
상대는 육 척이 넘는 키에 기술까지 제대로 익힌 그야말로 제격을 갖춘 장사였다.
그는 작년과 다름없이 짱짱한 기운을 쓰고 있었다. 그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먼저 공격을 하지 않았다. 우람한 덩치로 떡 버팅기고 있다가 하대치가 이런저런 공격을 가하면
슬슬 피하듯 쳐냈다. 그러다가 하대치가 허점을 보였다 하면
순식간에 들어 던지거나 메다꽂았던 것이다.
하대치는 번갯불 치듯 빠른 동작으로 몇 번 그의 정갱이를 걷어찼다.
그러나 그는 꿈쩍 하지 않았다. 하대치는 가망 없음을 알았다.
그렇다고 세번째마저 개구리 패대기쳐지듯 모래밭에 나가 떨어질 수는 없었다.
그의 마음을 팽팽히 뻗질러오르는 오기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놈을 모래밭에 처박아야 2년동안 거푸 당한 분이 풀릴 것 같았다. 아니, 어렸을 때부터 키 작은 연유로 받아왔던 놀림의 창피스러움과
철이 들어서도 남들 앞에 선뜻 나서기가 왠지 주저스럽던 그 지랄 같은 기분이 씻어질 것 같았다.
하대치는 전신에 힘을 돋우며 그를 밀치는 듯 하다가
오른쪽 다리로 상대방의 다리를 감을 듯했다. 그건 누가 보나 다리후리기를 하려는 자세였고, 상대방도 그에 맞선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하대치의 다리는 그대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다시 파고들었다.
그리고 상대방이 억 비명을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구경꾼들은 와아 함성을 터뜨렸고,
패자는 몸부림치듯 모래밭을 뒹굴며 아이고 아이고 황소울음 같은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두 손은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그때서야 그가 부자지를 채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대치는 당연하게 반칙패를 당했고,
상대방은 부자지를 싸잡은 승자가 되어 엉기적 거리며 소를 몰고 갔다.
하대치는 씨름대회 출전이 세 번으로 끝난 것은 소작회사건 때문이었다.
일본인 지주 중도를 상대로 쟁의를 벌였다가
강제징용에 끌려가 5년여를 혹사당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나이가 들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힘 자랑을 하고 싶을 만큼 그의 정신은 풋과일이 아니었다.
일본 식민정치는 소작회같은 모임을 철저하게 불법화하고 있었고,
그런 모임에 가담했거나 연루되어 검거된 사람들은 반국가적 공산주의자로 취급 되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모임은 상호 유대관계는 없었으나 전국적으로 은밀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하대치가 속했던 소작회를 이끌었던 사람은 바로 염상진이었다.
그는 사범학교를 나오고서도 교편을 잡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일본놈 정신을 가르쳐야 하는 선생질을 하는 것은
일본놈 순사나 군인이되어 독립군을 잡아 고문하고, 뒤쫓으며 총질 하는것과 똑같이 앞잡이 노릇 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농사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사범학교를 다니게 된 것도 순전히 아버지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하대치의 눈에는 그는 아는 것이 너무도 많았고,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사범학교까지 나온 사람이
삼복더위에 나무그늘에 앉아 느긋한 목청을 뽑아대는 매미 신세와 다를 게 없는
선생질을 마다하고 그 궂고 험한 농사일을 작정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대치는 염상진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다.
염상진은 용한 점장이가 점을 치듯이
하대치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골라내어 대신하고는 했다.
다 똑같은 사람끼리 어찌 차등이 있어야 되겠느냐.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듯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은 것이다. 양반이 따로 없고 상놈이 따로 없다.
양반의 피가 따로 있고 상놈의 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양반이란 것들이 저희들 좋게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다.
마찬가지로 지주라는 것도 따로 없고 소작인이란 것도 따로 없다.
지주라는 것들이 소작인은 대대로 소작인이 될 수밖에 없도록
소작법을 악질적으로 만들었지 때문에 지주는 영원히 지주로 떵떵거리고
소작인은 영원히 소작인으로 배를 곯게 된다.
그 많은 소작인들이 비참한 생활을 면하고 모두 평등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봐라, 양반이란 것들은 그 많은 백성들의 피를 빨며 배를 불리다가 나라를 빼앗겼고,
다시 일본놈들과 작당해서 일본놈들의 보호를 받으며 같은 민족을 짐승취급하고 있다. 일본놈들보다 더 나쁜 놈들이 그 놈들인지 모른다.
일본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지주놈들을 없애는 것은 한목에 해야 될 일이다.
염상진은 어느 때 한번 음성 높이는 일 없이 차분차분하게 말하고는 했다.
그런 염상진의 말은 무언가 갑갑한 멍울로 가득 차 있는 하대치의 가슴을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되어 어루만졌고, 암담하게만 여겨지는 앞길을 열어주는 것 같은
한 줄기 밝은 빛이 되어 쏟아졌다.
염상진은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게를 지고 걸어가며, 새를 보는 논둑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는 풀밭에서
예사로운 이야기 하 듯 했다. 나중에서 안 일이지만,
그것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중도를 상대로 쟁의를 일으키기 전날 밤에야 비로소 하대치는 염상진을 따르고 믿는 사람이 자신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거기에 모인 열두 명은 염상진만을 개별적으로 상대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과 뜻은 하나같이 맞아들었다.
그들은 징용에 끌려가는 것으로 끝났지만
염상진은 재판을 받아 2년이나 징역살이를 치러야 했다.
출감을하고 며칠이 지나 그의 집에는 징집영장이 날아들었는데
염상진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는 이런 사태를 예견했던지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는
다음날 나가 그 길로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이 되기까지 3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림자 한번 비추지 않았다.
그런데 해방이 되기가 무섭게 모습을 나타낸 그는
'금강산에서 중 노릇했다'는 무뚝뚝한 한마디로
그 동안의 행적을 일축해버려 사람들의 궁금증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하대치와 염상진은 5년 만에 서로를 끌어안는 감격적인 해후를 했다.
그때 염상진이 격한 어조로 터뜨린 첫마디가 '하 동무!'였다.
하대치 일행은 횡개다리에서부터 북쪽으로 펼쳐진 고읍들을 향하여 바쁜 걸음을 옮겼다.
전동리가 시작되는 홍태거리에 이르자 낙안과 고읍 들녘이 흐린 달빛 아래 아슴하게 드러났다
하대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약속한 장소 옥산은 맞은편 들녘의 끝머리 어둠 속에 있었다.
들녘의 왼쪽 옆으로 관통되고 있는 것이 보성을 지나 광주에 이르는 국도였고,
오른쪽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것이 낙안에 이어지는 옛길 이었다.
그 어느쪽 방향도 탐탁지가 않았다. 그 동네들을 피하자면 부득이 백고지 정도의 산길을 타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시간소모가 너무 많았다.
옥산까지의 직선 코스인 들녘 한가운데를 질러가기로 결정했다.
거기에는 좋은 은폐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고읍들의 젖줄 노릇을 하는 냇물이
들판의 가운데를 꿰뚫어 흐르고 있었다. 그 양쪽 방죽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더없이 좋은 은폐물이 되어줄 것이었다.
[하대치] ** "저 개굴창을 타고 가자."
[공산당원] "괜찮을께라?"
[하대치] "암시랑안혀. 요 들판이 을매나 넓은디,
나까짓거 하나 꼼지락댄다고 누구 눈에 띌 성부르냐?"
하대치는 잔소리 말라는 듯 내지르고는 첫발부터 크게 떼어놓았다.
이내 나타난 “들몰”을 옆으로 비켜나갔다.
3 들몰-하대치의 뇌리에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마누라였다.
들몰은 마누라의 친정이었다. 그래서 순심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있는데도 사람들은 마누라를 “들몰댁”이라 불렀다. 그는 가슴이 찡 울리는 것을 느꼈다.
코허리 맵게하는 그 울림을 떼쳐내기라도 하듯 그는 거칠게 얼굴을 훔쳤다.
그러나 집을 나설 때의 마누라의 잔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안쓰럽고 미안하고 딱하고, 마누라에게는 무어라고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열아홉인 그에게 마누라는 열여덟에 시집을 왔다. 그리고 징용에 끌려갔다
돌아오니 네 살짜리 아들을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
꼭 거짓말 같고, 꼭 금덩어리를 횡재한 것만 같은 그 기분 그대로였다면
그때부터 두더지가 되어 땅만 팠어야 했다.
마누라의 부지런함과 자신의 뚝심을 합쳤더라면
아무리 소작이지만 배 곯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꼭 한 가닥만이 나이었다. 그에게 더 굵은 가닥은 따로 있었다. 그는 가망 없는 농사에 파묻히기보다는 그것을 가망있게 만드는 운동에 빨려들었다.
그는 염상진과 함께 1년 감옥살이를 했다.
그때도 마누라는 갓난 사내아이를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러면서도 마누라는 미륵불의 현신인 듯 변함없는 얼굴이었다.
어찌보면 웃음기가 감도는 듯도 싶고, 어찌 보면 아무런 표정이 없는 것도 같은,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편안한 느낌을 주는 얼굴로 마누라는 그를 대했을 뿐이다.
그의 아버지는 며느리의 그런 얼굴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겼다.
미륵불이 현신한 상으로 집안에 부귀영화를 이룰 관상이라는 것이었다.
좋다고 해서 기분 나쁠 것 없는 말이었지만 어느 관상쟁이가 얼빠진 소리 꽤나 지껄였다고 그는 귓등으로 흘려듣고 말았다.
마누라는 표현을 하지 않을 뿐 알 것은 다 알고 있었다.
징용에서 돌아와 횡재한 것 같은 아들을 보고 고맙기도 하고 면목없기도 해서
[하대치] "쓰잘디웂는 짓거리허다가 잽혀가 당신 고상만 쎄빠지게 시켰구만"
하고 그는 머리를 긁적였는데,
[들몰댁] "주색잡기허신 것도 아니고, 남정네 허는 일인디 무신 깊은 뜻이 있겄제라." 마누라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1년 징역을 살고 나왔을 때도 마누라는 똑같은 말을 했다.
마누라는 아무 배움이 없었지만 속이 깊었고 심성이 착했다.
특히 마누라의 지칠 줄 모르는 부지런은 동네 사람들의 입을 모으게 했다.
아마도 그건 가난한 소작인의 자식으로 커나면서
어렸을 때부터 체득한 삶의 방법이었을 것이고,
더구나 남편이 오래 집을 비우게 되자 그 부지런은 더 질기고 억세게 되었을 것이다.
남정네가 하는 뜻깊은 일이 무엇이었길래
결혼 10년 동안 남편으로서 마누라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하대치는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었다. 그건 안개 자욱이 낀 포구처럼 가슴 스산해오는 슬픔이고 죄의식이었다.
그런데, 또 뒤쫓아오는 위험을 피해 언제 돌아오게 될지 모를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누라를 보듯 저만큼 멀어진 들몰을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마음 여리게 만드는 그 축축한 생각을 떼치려는 듯 걸음에 속력을 가했다.
하대치가 옥산 입구 서낭당에 도착하니 염상진은 이미 와 있었다.
강동식네 조를 기다리기위한 경계를 세워놓고 돌담 구석에 염상진과 마주 앉았다.
[하대치] "앞으로 어쩌겄는가요?"
하대치는 불타오르던 경찰서를 생각하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불쑥 물었다.
[염상진 위원장] "하 동무도 다 짐작은 하겠지만 한참 동안 어려운 투쟁을 해야 할 것이오. 주력부대가 무너졌으니 우리의 혁명 시도는 일단 실패한 것이오. 그러나 힘을 내시오.
혁명 완수는 실패 다음에 얻어지는 값진 열매니까."
염상진은 어조만 전라도의 것일 뿐 거의 사투리를 쓰지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하대치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며칠 동안 숨가쁘게, 피뜨겁게 벌어졌던 일들이 꼭 꿈결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경찰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도망할 줄을 몰랐고,
경찰이 없는 세상에 지주며 유지라는 것들이 또 그렇게 맥을 못 쓸 줄을 몰랐었다.
꼭 자기네들 세상이 온 줄 알았는데, 지주는 처단되고
소작인이 없어지는 세상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믿음이 미처 굳어지기도 전에 어디론지 쫓겨갈 줄은 정말 몰랐었다.
[하대치부하] ** "쩌그 강 동무조가 오는갑구만이라."
염상진과 하대치는 건너편으로 눈길을 던졌다. 논둑을 타고 이쪽으로 빠르게 이동해오고
있는 세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하대치] "워디로 가는가요?"
[염상진위원장] "일단 조계산으로 집결하도록 되어 있소."
둘의 말은 일단 여기서 끝났다. 하대치는 더 물을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목적한 임무는 무사히 완료되었고,
곧 옥산 옆구리를 돌아 쌍암면 쪽으로 길을 잡았다.
하대치는 자신들의 일행이 아홉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
각 마을마다 흩어져 있는 많은 동무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염상진에게 그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건 금기였다.
하대치는 간절하게 담배가 피우고 싶은 것을 참아내며,
무겁고 우울한 마음으로 쌍암의 문턱인 오금재를 오르고 있었다.
깊은 어둠속에서 10월 25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3. 민족의 발견 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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