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3장 민족의 발견
1-3(2)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3장 민족의 발견
염상진이 불쑥 찾아든 것은 그믐날 밤이었다.
구두를 신은 채 방으로 뛰어든 그는 다짜고짜 내쏘았다.
[염상진] "자네 학병 나가기로 했담서?"
[김범우] "형님, 이거 어쩐 일이요.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요?"
[염상진]"가세, 개돼지처럼 끌려갈 날만 기다리지 말고 나허고 가세."
염상진의 기세는 곧 김범우를 끌고 나갈 것처럼 열 받쳐 있었다. 김범우는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듯 방바닥에 주저앉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김범우]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쇼."
[염상진] "남 일?"
염상진의 얼굴이 딱 굳어지는 것 같더니 금방 부드럽게 풀리며,
[염상진] "자네 억지소리 허는구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허는 자네 심정 내 다 알고 왔네. 요런 난감헐 때는 누구한테나 어떤 계기가 필요헌 법이네. 가세, 내가 자넬 안전허게 피신시켜줄 테니까."
[김범우] "형님 맘은 고맙지만 그건 안돼요."
김범우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염상진] "자네 정신 똑똑허니 차려야 쓰네.
자네 어르신이 일본놈들 헌테 기부금 내는 것허고,
자네학병 지원허고는 생판 다른 문제니까.
자네 행동도 그렇게 이해되고 용서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네.
그건 자네 독단적인 문제고, 자네가 잘못 행동하면 범준이 형님 업적까지 똥칠허는 것이네. 일본놈들 공갈협박에 굴복허지 말고 저항해야 허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용기있게 박차고 나허고 가세.
요건 마지막 기회네."
[김범우]"형님 말 고맙지만 난 그럴 용기가 없군요."
김범우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염상진] "돼지처럼 학병에 끌려갈 용기는 있고!"
염상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눈이 불을 뿜고 있었다.
[김범우] "형님이 가진 용기만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내게도 따로 계획이 있어요." 염상진의 눈을 맞쏘아보고 있는 김범우의 눈에는
염상진이 뿜고 있는 열기를 능히 받아낼 만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염상진]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염상진이 침을 뱉듯이 말하고는 돌아섰다.
김범우는 그가 피신중인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범우] "형님, 조심해 가시오."
김범우는 다급히 뒤따라 나가며 말했다.
염상진은 소작쟁의 때문에 형을 살고 출감하자
뒤따라 나온 징집영장을 피해 자취를 감추었었다.
그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찾아온 마음이 너무 고마웠고,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헤어질 수 없는 것이 김범우로서는 너무 가슴 아팠다.
김범우는 1946년 1월이 다 저물어갈 즈음에 학병에서 돌아왔다.
집을 떠난지 꼬박 2년 세월이 흘러 있었다.
[김범우 모친]"워디 보자, 내새끼 워디 보자. 니를 영영 못 보고 죽는 줄 알었다.
요런 무정헌 것아, 워디서 멀 허다가 인자사 오냐
금메. 넘덜언 다 오는디 니만 안오니께 이 에미 속이 워쨌을 것이냐.
타고타고 또 타고, 참말로 영영 못보고 죽는 줄 알었다. 위디 보자, 워디 보자."
병색이 완연한 어머니는 김범우의 전신을 더듬고 또 더듬으며 한정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해방이 되는 날부터
두 자식을 기다리며 밤낮없이 흘렸을 눈물로
벌겋게 짓물러 내려앉은 어머니의 눈자위를 보며 김범우는 속 울음을 씹었다.
거기엔 모성의 질기고도 아픈 인내가 응결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득병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게 해방의 의미는 두 아들을 다시 품에 안는 것이었을 터였다.
그런데 응당 돌아와야 할 두 아들은 한 달, 두 달, 석 달,
그리고 해가 바뀌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석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다 저승객이 된 것이라는 파다한 소문을 어머니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그 어떤 매질보다 아픈 그 소문의 공포를 어머니는 견뎌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김사용, 김범우 부친] "몸은 성하냐?"
절을 받고 난 아버지의 첫 물음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물음이 나올때까지 아버지는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김범우는 보료 끝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런 아버지를 쳐다보지 않았다.
[김사용, 김범우 부친] "그려, 워디서 멀 허니라고 그리 오래 걸렸냐?"
아버지의 이 두 번째 물음은 꼭 대답을 듣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 동안의 애태운 기다림에 대한 어머니와는 다른 감정 표현이었다.
설령 그것이 아니었다 해도
김범우는 자신이 거쳐온 2년동안의 생활을 결코 입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김사용, 김범우부친] "가그라, 건너가 쉬어."
아버지는, 을매나 고단허겄냐, 하는 말을 혼잣말처럼 낮게 뇌었다.
김범우가 기억의 무덤 속에 영원히 묻어버리고자 했던 2년 동안의 행적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부터 들춰지게 되었다. 순천 주재 미 군정청에서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그 날도 김범우는 끈끈한 잠의 흡인력에 빨려들어
아침도 먹지 않은채 정오를 거의 보내고 있었다. 수마(睡魔)라는 말이 있었다.
글자의 뜻 그대로 잠의 마귀가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김범우는 속수무책이었다. 처음에는 그 마귀를 떼쳐내려고 약간 노력을 해보았다.
그러나 곧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그가 일으켜 세우려는 의식의 마디들은
그 마귀의 힘에 흐물흐물 녹고 말았다. 그건 딱히 잠도 아니었다.
전신을 가눌 수 없게 어딘가 깊고깊은 곳으로 가라앉히는
질기고도 끈끈한 액체의 피로감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김범우는 거기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는 혼미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가 자꾸만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리끝까지 푹 잠겨 있는 그 끈끈한 액체의 구속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렴풋하긴 했지만 누군가가 부르고 있는 소리를 의식하고,
그 의식에 따라 일어나야 된다는 의식을 하고,
자신이 일어나려고 하는 의식을 의식하는데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은 몸대로, 의식은 의식대로 개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한창길]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순천 군정청에서 왔습니다."
이 소리가 그의 의식과 몸을 순식 간에 하나로 결합시켰다.
[김범우] "거기 누구요!"
그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며 문 밖에다 대고 와락 고함을 질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뒤엉켜지고 있었다.
그는 견디기 어려운 역겨움을 느꼈다.
[머슴] "저어...군정청에서, 군정청에서 손님이 오셨구만요."
주저하는 목소리는 군정청을 두 번 씩이나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범우는 어이없어하는 웃음을 피식 흘렸다. 머슴까지 무의식적으로 두 번씩 강조할 만큼
그 위력을 떨치고 있는 미군정청에 김범우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망할 자식들, 빨리도 찾아왔군, 하고 생각하며
김범우는 잠시 오늘이 며칠일까 하고 날짜를 가늠해보았다.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김범우] "무슨 일이오?"
김범우는 무감각한 어조로 말하며 방문을 밀었다. 방으로 왈칵 밀려든 건 한 바지게만큼의 1월의 찬바람과 부신 햇살이었다. 그는 숨을 흡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떴다. 햇살을 맞받아 자꾸만 좁아지려는 그의 시야에 머슴과 함께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한창길] "안녕하십니까, 김 선생님."
사내는 입심 좋게 허리를 반으로 푹 꺾으며 인사했다.
김 선생님? 어이없어 코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김범우는 꾹 눌렀다.
서른서넛이 되어 보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사내의 넉살이 역겨웠다.
[한창길] "나흘 전에 돌아오셨더군요. 그 동안 편히 쉬셨습니까?"
김범우는 사내의 말을 듣고,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고 깨달았다.
자신은 나흘 동안 줄곧 수마에 붙들려 시간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너 번 밥상을 대하고 몇 차례 변소를 가고는 했지만
그런 행위는 모두 잠에 취한 채 행해진 것에 불과했다.
김범우는 비로소 확실해진 시간을 의식하며 사내를 향해서 똑바로 시선을 던졌다.
사내의 어조는 지극히 부드럽고 예의바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어감은 정반대였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서 모든 걸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잠은 그만 자는게 어떨까요,
사내의 어감은 이런 의미를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사내는 김범우의 눈초리를 의식했는지 흐트러지지도 않은 자세를 다시 고쳐 똑바로 섰다.
[한창길] "저는 군정청에 근무하는 한창길입니다. 청장이신 화이트 대위님께서 김선생님을 모시고 오라는 분부를 받들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내가 경직된 음성으로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한달음에 용건을 쏟아놓았다.
김범우는 또 헤설픈 코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눌렀다.
사내는 배고픈 고양이처럼 영악하게 영리한 친구였다.
상대방의 기분 변화를 예민하게 간파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언행의 명암을 뒤바꿔가는 기민성을 보이고 있었다. 직책이 뭐냐고 물어볼까 하는 짓궂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김범우는 그만두기로 했다. 자신의 육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 위인의 됨됨이로 보아
양지 지향성 식물처럼 벌써 여러 번의 배신적 변신을 꾀한 넝마 같은 녀석일 게 뻔했다.
[한창길] "급히 모시고 오라는 분부였습니다."
사내는 김범우의 눈길을 견뎌내기가 곤혹스러웠던지 불쑥 말했다.
[김범우] "분부라? 그거 어느 나라 말이오?"
김범우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몰려 있었다.
[한창길] "네에?"
[김범우] "그건 옛날 양반 찌끄레기들이 쓰기 좋아했던 말이오.
요샛말로 하자면 명령이 되겠는데, 그 명령을 나한테 한 거요, 아니면 형씨한테 한거요?"
[한창길] "저어, 그거시 그렁께..."
당황한 사내의 입에서는 굳이 쓰기를 피하던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김범우] "형씨 말대로 나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니까
그 명령이 나한테 한 것은 아닌 게 분명한 것 같소.
난 몸이 아파서 못 간다고 가서 전하시오."
김범우는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때 문을 덥석 잡는 손이 있었다.
사내는 어느새 다리를 마루에 걸친 채 문을 붙들고 있었다.
[한창길] "선생님, 어쩔라고 이러신당가요. 군정청장 미군 대위의 말인디요."
사내는 김범우의 코앞에 얼굴을 디밀고 다급하게 말했다. 김범우는 울컥
비위가 상하는 걸 느끼며
굳어진 사내의 얼굴에 침을 뱉아버리고 싶은 역겨움을 간신히 참아냈다.
[김범우] "날 염려하는 거요? 화이트 대위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미군 대위가 날 어쩌지는 못할 것이오. 그걸 염려했거든 맘놓고 돌아가시오."
김범우를 쳐다보는 사내의 얼굴은 금방 의혹에 찬 두려움으로 덮였다.
사내는 그런 감정의 변화를 전혀 감추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김범우 쪽에서 그런 사내를 보기가 민망했다.
[한창길] "김 선생님, 선생님이 훌륭하신 분인 것을 워찌 몰르겄습니까.
김 선생님이 안 가시면 명령수행을 제대로 못 헌 지 입장이 워찌 되겄습니까.
대위님이 찌쁘차꺼지 내주심서 모셔오라 혔고, 길 몰르는 미군 운전수허고 육십리 길을 요렇게 쫓아왔는디, 지 낯을 생각혀서라도 가 주셔야 겄는디요."
사내는 더할 수 없이 비굴하게 애걸하고 있었다. 이 친구가 만약 일본 형사 출신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을 것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김범우는 하고 있었다.
[한창길] "그라고 말입니다. 김 선생님, 오늘 안 가신다고 혀서
대위가 그만둘 줄 아신가요? 우리 같은 쫄짜야 깊은 내막 몰르고 눈치로 때레잡는 것이지만, 대위는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을 날마동 보낼 것이구만요. 어채피 한 번은 만나야 헐 판국이라면 날마동 볶이다가 만날 것 머 있는가요. 고름이 살 안되는 법인디,
워쩌실랑가요?"
==사내는 노회한 눈동자를 굴리며 김범우의 감정을 읽어내려 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바로 그 점이 이미 마음에 걸렸었다. 그들은 일단 필요로 하는 일에 대해서 분명한 이유, 확실한 근거, 그리고 충분한 납득이 되기 전에는 결코 단념하지 않는 미련스럽도록 철저한 종족이라는 것을 김범우는 이미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김범우] "가도록 하겠소. 나가서 기다리시오."
김범우는 무표정하게 말했고,
[한창길] "선생님, 고맙구만이라, 고마워요."
한창길이라는 나이 든 사내는 가엾을 정도로 감격스러워했다.
김범우는 찬물로 낯을 씻고 몇 푼의 돈을 챙겨가지고 집을 나섰다.
대문 앞에는 지프차가 멈춰 서 있었고, 그 둘레로는 크고 작은 동네 아이들이
경계와 호기심이 엇갈리는 눈으로 차를 애워 싸고 있었다.
핸들에 팔꿈치를 괴고 앉은 흑인 병사는
무료한 듯 느릿느릿 껌을 씹으며 큰 눈을 껌벅이고 있었다.
아이들의 접근을 막듯 뒷짐을 지고 엄격한 표정으로 서있던 한창길이란 사내는
김범우가 대문을 나서는 걸 보고는 재빨리 다가갔다.
김범우의 앞에 이른 사내의 얼굴이 한 순간 일그러졌다.
[한창길] "저어...혹시 양복이..."
김범우는 사내의 망설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김범우] "왜, 이 옷으로는 대위를 만날 수가 없겠소?"
[한창길] "머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왕이며..."
[김범우] "양복보다 이 우리나라 옷이 얼마나 좋소?
이 추위에 뜨뜻하고 몸 편하고, 어서 갑시다."
사내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김범우는 사내의 지적이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며칠동안 입고 뒹굴었던 바지 저고리를 그대로 걸치고 나선 참이었다. 양복을 갈아입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긴 했지만 귀찮고 번거로운 생각이 앞서 외투만 들로 나왔던 것이다.
앞자리에 오르는데 운전병이 "굿모닝 써" 하고 인사했다.
"하이, 굿모닝." 거의 무의식적으로 인사를 받고는 김범우는 순식간에 저질러진 자신의 경솔에 어금니를 물었다.
태평양의 외로운 섬 산타 카탈리나를 떠나 샌프란시스코 교외 어느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면서 앞으로는 영원히 영어를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운전병이 '써'라고 존대를 하는 것 조차 뱀 껍질이 닿는 것처럼 싫었다. 위에서는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을 것이고 운전병은 그 명령을 충실히 지킨 것뿐이었다. 그들의 그 철저성이 싫었다. 이제 다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도 그 철저성의 발로였고, 산타 카탈리나 연합군의 동지에서 하룻방 사이에 포로가 되어 샌프란시스코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것도 그 철저성의 실천이었다.
=
김범우는 자신이 집에 돌아온 지 나흘밖에 안됐는데 그들의 손이 뻗쳐오는 신속성에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의 정보의 치밀성이나 기민성에 대해서는 이미 산타 카탈리나에서 탄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벌교라는 하나의 읍에 대해서도 전봇대의 수효, 소화다리의 길이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산타 카탈리나에서 벌교 포구의 침투가 제안되었는데, 현지탐사를 한 잠수정에 의해 뻘 밭이 너무 길기 때문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이 닷새 만에 날아들 정도였다. 로스앤젤레스의 근해 산타 카탈리나 섬과 한반도의 구석 벌교 포구와의 거리감으로는 상상도 안되는 일이었다.
[한창길] "김 선생님은 미국서 사셨는가요?"
차가 진트재를 올라가고 있을 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가 뭔가를 좀 알아야 되겠다는 듯 마침내 은근하게 물어왔다.
[김범우]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마시오. 그건 형씨의 임무 밖이니까."
김범우는 찬바람이 휙 끼칠만큼 매정하게 잘랐다. 사내는 흠칫 놀라며 긴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왠지 모르게 턱없이 거만하게 느껴지는 김범우의 뒤통수를 사납게 노려보며 사내는 마구 욕을 퍼대고 있었다. 좆 겉은 눔, 지랄허고 자빠졌네. 대갱이에 피도 안 모른 새끼가 영어 줄이나 씨불리는 모양인디, 지미럴 워디 두고 보자. 언제고 내 손에 걸려들먼 뻑다구럴 추려뿔 것잉께.
[화이트대위] "오우 톰슨,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소."
화이트 대위는 그들 특유의 약간은 허풍스럽고 무절제한 것 같은 몸짓을 지으며 김범우를 맞이했다. 자신을 굳이 '톰슨'이라고 부르는 것에 김범우는 냉소를 보냈다. 일부러 그렇게 호칭함으로써 유대감을 상기시키고, 자기네의 관심의 도를 나타내고, 이쪽의 마음을 일거에 사로 잡으려는 그들의 철저성이 잘 드러난 행동이었다.
[김범우] "안녕하십니까, 화이트 대위님, 용건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게 있습니다. 내 호칭에 대해섭니다. 나는 톰슨이 아닙니다.
그 이름은 산타 카탈리나 섬을 떠나면서 잊도록 되어 있던 이름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OSS 첩보훈련원 톰슨이 아니라 조선인 김범우라는 사람인 것을 확실히 구분해주기 바랍니다."
김범우는 일부러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며 딱딱하게 말했다. 그들이 '톰슨'이란 호칭으로 얽고자 하는 그물을 미리 막을 필요가 있었다. 화이트 대위는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이었던지 무척 당황하는 태도를 감추지 못했다.
[화이트대위] "아아, 그 점은 내 실수였소, 미스터 김.
기분 나쁘게 했다면 내 사과하겠어요. 난 단순히 반가워서 사용해본 이름일 뿐이었소."
역시 그들다운 솔직하고도 능란한 제스처를 화이트 대위는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제스처에 불과할 뿐
그의 상한 기분까지 회복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김범우는 잘 알고 있었다.
[김범우] "왜 나를 불렀는지요?"
김범우는 대위와의 이야기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화이트 대위] "아, 그건 다름이 아니라..."
대위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쩝쩝 마른 입맛을 다시고는,
[화이트대위] "미스터 킴이 우리와 함께 일해주기를 바라고 있소."
빠르게 말을 해치웠다. 뻔한 요구였다.
[김범우] "산타 카탈리나의 연장으로서 말입니까?"
김범우의 시선은 날카로웠고, 대위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대위는 마땅한 말을 찾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인지 천천히 담배를 빼들었다.
[화이트 대위] "우린 능력있는 통역관이 필요하오. 물론 적정보수도 지급하게 될 것이오." 대위는 더듬거리듯 어렵게 말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엷게 웃었다.
적정보수라는 말이 자신을 유혹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김범우] "산타 카탈리나의 일원이 됐던 것도
전적으로 내 개인의 선택권에 의해서였습니다. 더구나 적정보수가 지급되는 통역관의 일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줄 압니다.
대위님의 호의는 고마우나 나는 그 일을 맡을 형편이 못됩니다."
김범우는 그들의 생리에 맞게 명백한 태도를 보였다. 대위는 몹시 당혹해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 당혹해 함이 비위에 거슬렸다. 그것은, 말만 꺼내놓으면 감지덕지할 것이라고 이쪽을 쉽게 생각했던 계산착오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화이트 대위] "미스터 킴, 이건 새로운 당신네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오."
김범우는 또 엷게 웃었다.
대위는 그들다운 마지막 카드를 내민 셈이었다.
[김범우]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내 전공은 영문학이 아니니까요."
대위의 얼굴은 보기 민망할 지경으로 일그러졌다.
[화이트 대위] "딴 일이라니, 그게 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대위는 야비하게도 회피의 기회를 봉쇄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김범우] "난 선생이 될 겁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새 나라 건설에 그 어떤 일보다 유익하다 고 생각합니다."
김범우는 침착하고도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꾸며대고 있었고,
그런 자신이 그렇게 믿음직스럽고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화이트 대위] "그렇지요, 그렇겠지요. 교육, 그거 중요한 일입니다."
군정청을 나서며 전주가 고향인 박두병을 떠올렸다.
아마 박두병도 자신과 똑같은 제의를 받았을 것이 거의 틀림없었다.
그도 어떤 이유를 붙여서든지 그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동지에서 포로로 바뀐 처우에 대해서 얼마나 분개하고 절망했던가.
그는 미얀마 전선의 같은 소대에서 만나, 나흘 전 인천항에 귀국해서 헤어질 때까지 2년여를 그야말로 생사고락을 같이한 기막힌 사이였다.
==그와 함께 일본군을 탈출해서 영국군에 투항했고,
일본군 포로가 아닌 조선인으로 연합군 편에서
무슨 일인가를 하고자 했던 요구가 받아들여져 두 사람은 미국으로 보내졌다.
그래서 그들은 그 혹독한 OSS 첩보요원 훈련을 밤낮없이 3개월간을 받았고,
미 지상군의 한반도 상륙을 위한 전초작업 임무를 띠고 침투되려는 즈음에
일본땅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이다.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훈련지 산타 카탈리나 섬을 떠나면서
그들은 OSS 첩보요원에서 포로 신세로 바뀌어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던 것이다.
[비크스탭 미육군대령] "여러분,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여러분을 이렇게 취급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는 일개 육군 대령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한테는 분명 특별조치가 취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정부와 정부 사이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특별 취급해서 인계하려고 해도 여러분을 인수할 기관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나라에는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포로 취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는 논리의 모순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당장 정부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그들로서는
그 논리에 순응해야만 그나마 귀국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더 따질 수 있는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본인의 말마따나 일개 육군 대령에 불과한 OSS 훈련책임자 비크스텝을 붙들고 백번 천번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참으로 엉뚱한 곳에서 나라 잃은 서러움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껴야 했다.
학병에 끌려나가면서도, 미얀마의 정글 속에 동료의 무덤을 계속 파면서도,
후퇴하는 자동차를 쫓아오며 경상도 사투리로 부르짖다가 끝내 길바닥에 나둥그러지던 정신대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나라 잃은 서러움이 그렇게 기막히지는 않았었다.
기대하지 않은 자에게 받는 핍박보다 기대했던 자에게 당하는 배신이 열 배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은 계기였다.
인천항에 내려진 포로들은 미군의 명령에 따라 체조대형으로 양팔들을 벌리고 섰고, 바닷바람이 몰아쳐오는 1월의 추위 속에 모두는 발가숭이가 되어야 했다.
[OSS 박두병] "범우, 자네 꼬치가 춥다고 허네."
박두병은 허허대고 웃으며 말했고,
[김범우] "내 꼬치야 상관없네만 자네 꼬치나 얼지 않게 허소. 당장 일 시켜 얄 것 아닌가." 김범우는 이미 장가를 간 박두병을 상기하며 대꾸했고,
두 사람은 발가벗은 채 찬바람 속에서 허허한 웃음을 허허로운 허공에다 뿌리고 서 있었다.
세 번째의 명령에 따라 발가숭이 포로들은
왼쪽에 줄 맞춰 놓여진 옷가지 앞에 하나씩 서야 했다.
그건 헐고 때묻은 일본군의 옷이었다.
결국 수송선을 타기 전에 하와이에서 얻어 입은 미군 옷은
하나도 남김없이 반납한 셈이었다.
김범우는 그것이 차라리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랐다.
기억마저도 그렇게 깨끗하게 잊혀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김범우가 군정청을 다녀온 다음부터
자신에 관한 소문이 가마니 속에서 썩는 홍어 냄새 풍기듯 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두문불출한 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염상진이 찾아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가 밤이 아닌 대낮에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 김범우로서는 기뻤다.
염상진이 보여준 끈질긴 항일정신은 어느 모로나 값지고 존경할 만한 것이었다.
[염상진] "요새 떠돌아댕기는 소문은 어찌 된 것인가?"
서로의 문안인사가 끝나자 염상진이 가려운 데를 못 참고 긁 듯 물어 온 말이었다. 김범우는 염상진이 찾아왔을 때 벌써 그의 궁금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염상진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아마 그 소문이 아니었으면 염상진은 결코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것임을
김범우는 알고 있었다.
자기가 그렇게 반대한 학병을 지원한 자의 무사 귀한을 축하하기 위해
시간을 버릴 만큼 염상진은 배알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김범우] "소문에 얼마나 살이 붙었는지는 모르지만 군정청 통역관 자리를 거절한 건 사실이오." "
[염상진] 그거 참 잘한 일이네. 자네가 왜 미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 노릇을해."
염상진의 목소리는 갑자기 열기를 띠었다. 김범우는 그 말투에서 짙은 정치 냄새를 맡았다. 해방과 더불어 염상진의 의식이 어느 방향으로 돛을 올렸는지 직감을 할 수 있었다
.
[김범우] "미 제국주의자들 이라니요? 듣고 보니 묘한 기분이 듭니다?"
김범우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염상진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김범우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자신이 통역관을 거절한 사실을
염상진은 아전인수 식으로 확대 해석하려 하고 있었다.
[염상진] "기분 묘할 것 없네. 마땅찮아서 그리 부르는 것뿐이니까."
염상진은 태연함을 꾸며보이며 대꾸하고는,
[염상진] "그런데, 소문은 그것만이 아니고 또 있던데..."
염상진의 오기는 김범우의 시선을 맞받아내며 말머리를 돌렸다.
[김범우] "더 무슨 소문이 있던가요?"
김범우는 지루함을 느끼며 담배를 빼 들었다.
소년적 호기심처럼 염상진이 정치의식에 기울어 있는 성급한 태도가 싫었다.
[염상진] "자네 앞에서 소문을 내 입으로 되씹을 필요는 없을 것이고,
일본군으로 학병을 나간 자네가 어떻게 미국에서 귀국을 했는지, 그걸 알고 싶네."
김범우는 짜증스러움을 느꼈다. 아버지께도 몇 마디로 간추리고 말았던 이야기였다.
김범우는 학병을 끌려나가면서 만주 쪽으로 배속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곳에는 독립군이 산재해 있고, 땅이 넓어서 탈주에도 용이할 것 같았던 것이다.
꼭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일본군이 안되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범우] "뭐,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미얀마에서 탈출해서 영국군에 투항했고,
일본군 포로로 수용소에 갇히기 싫어 연합군 편에서 무슨 일이라도 하려고 했고,
그러다 보니 미국까지 굴러간 거니까요."
김범우의 입 언저리에는 자조적인 웃음이 물려 있었다.
[염상진] "그래, 미국에서는 무슨 일을 했든가?"
염상진은 눈을 빛냈다.
[김범우]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요."
김범우는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그리고 금방 후회했다.
염상진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염상진] "자네, 아무말도 허기 싫은 모양이구만. 딱 한 가지만 대답하게.
소문에 첩보요원 훈련을 받았다는데, 사실인가?"
김범우는 담배를 비며 그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염상진] "범우, 내 경솔을 용서하게.
자네 깊은 속 모르고 학병 나간다고 그리 타박을 했으니. 자네는 큰 애국을 한 것이네."
염상진은 촌스러울 만큼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염상진을 김범우는 허망한 마음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염상진] "자네가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첩보요원이 된 것을
이제 와서 딴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미군의 흉계에 걸려들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일이야. 자네는 그것으로 또 한번 커다란 애국을 한 것이네."
염상진의 말은 금방 다른 채색을 하며 상기되어 있었다.
김범우는 그대로 들어 넘길수 없는 감정의 가시가 걸림을 느꼈다.
[김범우] "말마다 애국, 애국 하는데 괜히 과대하게 의미 부여하지 말아요,
속 느글거리니까. 그리고, 미군의 흉계에 걸려들지 않은 게 애국이라고 했는데,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요?"
김범우는 표나게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그는 자신의 말이 염상진의 속을 얼마나 긁을지를 잘알고 있었다.
[염상진] "미국 놈들은 우리나라를 망치려고 온 놈들이야!"
염상진은 마치 구호를 외치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범우] "그럼, 우리나라를 흥하게 하려고 온 사람들이 따로 있단 말이오?"
김범우는 말을 하면서, 내가 왜 어린애 장난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나 싶었다.
그러는 김범우의 얼굴에는 경멸적인 웃음이 드러나 있었다.
[염상진] "사회주의 건설만이 그 길이야!"
염상진은 부르르 떠는 몸짓을 하며 마침내 깃발을 세우듯 그 말을 부르짖었다.
그런 염상진의 눈은 묘한 광채로 타오르고, 입술은 응등 물려 있었다.
그건 이미 하나를 신념으로 선택해버린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김범우는 대화의 단절을 느낌과 동시에 짙은 피로감에 싸였다.
형용하기 어려운 서글픔이 자욱하게 가슴을 덮어왔다.
그건 하룻밤 사이에 포로 취급을 당해 잠 못 이루며 바라보았던 벽과
그 어찌 할 수 없던 외로운 체념이 불러오던 서글픔이었다.
[김범우] "좋아요, 어떤 주의를 따르든 그건 개인의 자유지요. 그러나,
그것이 곧 민족 전체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성급한 판단은 금물입니다.
미국이다, 소련이다,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사회주의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정치적 택일이 아닙니다.
그건 한민족이 국가를 세운 다음에나 필요한 생활의 방편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민족의 발견입니다. 그 단합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해요."
김범우는 이마에 돋은 식은땀을 닦으며 말을 마쳤다.
결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치닫고 있는 염상진을 보자 그 말만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염상진] "자네 말은 아주 그럴 듯해 보여. 그러나 그건 부르주아적 환상이야."
[김범우] "아니 그게 무슨말입니까?
미.쏘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그들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긴가 이념인가 하는 것에 놀아나
민족이 서로 갈라져서는 안된다는 뜻인데,
그게 부르주아적 환상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염상진] "우리에게 해방은 곧 인민혁명이야.
해방은 곧 새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고, 그 시작은 인민혁명을 통한 새 나라의 건설부터네. 그런데 자넨 시대역행적으로 케케묵은 민족이나 찾고있지 않느냔 말야."
[김범우] "그렇게 속단하지 마세요.
민족이라고 하니까 핏줄만을 중시해서 어중이떠중이 다 싸잡아서 말하는 민족인 줄 압니까? 현시점에서 친일 반역세력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어요.
그런 부류들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서
절대다수의 민중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집단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굳이 '민족의 발견'이라고 했어요. 형은 그게 바로 인민 혁명세력의 규합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닙니다. 그 민족에는 일체의 정치성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아니,더 확실하게 말해 그 민족 아래 모든 정치이념들은 단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국과 쏘련에 점령당해 있기 때문입니다.
미.쏘는 자기네들 이익추구를 위해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는 훼방꾼들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갈려 이념을 먼저 선택하면
우리 민족은 결국 분열밖에 할 게 없다 그겁니다."
[염상진] "그런 민족개념이라면 내가 경솔했네. 그러나,
자넨 현실을 제대로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훼방꾼은 미국일 뿐이데,
미국이 아무리 훼방을 놀려고 해도 그건 헛고생이네.
친일 반역자들을 빼놓고는 모두가 혁명세력이고,
거기다 또 쏘련이 있는데 미국이 무슨 수로 힘을 쓴단 말인가."
[김범우] "참 속편하고 간단한 생각이군요.
형은 정말 쏘련이 우리의 해방과 혁명을 돕는 우리 편이라고 믿습니까?"
[염상진] "그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린가!
일정 때부터 쏘련만큼 우리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관심쓰고 도와준 나라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김범우] "과연 그럴까요? 내가 두 가지 사실만 지적해 볼께요.
첫째는 신탁통치 결의고, 둘째는 미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탁통치라는 건 미국이 혼자서 결정한 일입니까?
그건 엄연히 쏘련이 두 개의 제국주의 국가와 나란히 앉아
작당하고 야합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장소까지 모스크바에서.
우리나라를 먹이로 놓고, 제국주의자들과 서로 이익을 분배하고 있는
쏘련의 처사가 과연 옳은 것입니까?
그런 쏘련이 어찌 우리 편일 수 있습니까?"
[염상진] "그것이야말로 자네가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쏘련의 전력 전술이야."
[김범우] "그래요? 철저한 그들의 대변자로군요.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를 보지 말고,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을 보려고 노력해보세요.
그럼 그 모순과 허위가 보일 겁니다."
[염상진] "자넨 생각이 너무 많이 변했구만. 미국 물을 먹어서 그런가?"
[김범우] "비꼬지 말고 내 말 마저 들어보세요. 둘째로 미군정이 인공을 부인했는데,
그게 미국이 현실적으로 힘을 쓰지 못해서 취한 처삽니까.
그건 곧 자기네 점령지구에서 공산주의를 부정한 것이고, 혁명을 부정한 것입니다.
이래도 미국이 힘을 못 쓰는 겁니까?"
[염상진] "그건 군정이 일방적으로 취한 만행이지 우린 그걸 인정하지도 않고,
부인 당하지도 않아. 우린 그 만행을 분쇄하기 위해 계속 투쟁을 전개하고 있어."
[김범우] "예,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행동통제를 받지 않는 포로로 특별취급을 받으며
수용소에서 내가 한 일이 뭔지 압니까?
미.쏘의 세계전략에 관한 책들과 논평들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얻어진 것은, 미국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고,
쏘련은 그에 못지않은 공산주의적 패권주의라는 사실입니다.
그 두 개의 어마어마하게 큰 발에 짓밟히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땅과 우리 민족입니다.
이런 상황을 직시할 때 우리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우리끼리 이념 대립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단합 아래 하나로 뭉치는 거라는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겁니다.
이게 헛소립니까?"
[염상진] "지름길을 두고 돌아갈 건 뭔가.
오늘 얘기로 자네가 사회주의를 버렸다는 사실만을 확실히 확인했네.
자네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허황한 것인가를 곧 알게 될 거네.
미국이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역사의 필연적인 흐름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네. 누구 말이 맞나 두고 보세."
염상진은 일어섰다. 김범우는 염상진을 올려다보았다
. 염상진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린 것 같았고,
김범우의 얼굴에는 쓸쓸함만이 머물러 있었다.
[김범우] "이제 학교로 돌아가는 게 어떻소?"
김범우는 잠꼬대를 하듯 말했다. 김범우는 자신이 분명 잠꼬대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염상진과 함께 사회주의를 논했던 먼 기억이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은 순천중학을, 염상진은 광주사범을 다니며 보낸 세월이
이젠 전설처럼 먼 이야기였다.
염상진이 이대로 떠나면 그때의 우정까지 영영 두 갈래로 벌어지고 말 것 같은
어두운 예감 때문에 김범우는 엉뚱한 말을 한 것이었다.
[염상진] "범우 자네 맘 내가 다 알어. 허나, 나는 자네하고는 피가 다르네."
염상진은 중얼거리듯 이 말을 남기고 급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4. 소화,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무당 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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