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태백산맥 조정래 대하소설 제1권 4장 소화,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무당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제 1 부 한의 모닥불
4장. 소화,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무당
[정하섭] "이 방은..."
정하섭은 낮은 목소리에 주저를 담았다.
그리고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뒤로 끌어당기는 그의 손은
목소리보다 조금 더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 방문을 열던 소화의 동작이 일순에 멎었다. 그녀의 고개가 느리게,
아주 느리게 그에게로 돌려졌다. 그녀의 눈길이 더듬듯 그의 눈을 찾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 정하섭의 마음에는
순간적으로 스쳐갔던 두려움과 의혹이 좀 더 확실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하섭] "이 방은..."
다시 되풀이하는 정하섭의 의식 속에서는 그녀를 갖고자 했던 뜨거움이 한결 식어있었다
[소화] "다 신령님 뜻인디...되레 보살피실 거구만요."
소화는 마치 무슨 주문을 외듯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전혀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그 읊조리듯 한 말은
이상한 긴장감과 탄력으로 정하섭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과 의혹을 한꺼번에 몰아내주었다.
소화가 한 말의 의미는 그의 머리를 한 순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에 정리된 그의 의식 속에는
'운명'이란 말이 흰 푯말 위의 검은 글씨처럼 또렷하게 박혀왔다.
운명..., 정하섭은 바로 눈앞의 그녀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자신을 처음 대했을 때의 공포감이나 경계심 같은 것은 흔적도 없었다.
흐린 그믐 달빛을 받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신령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준비라도 다 마친 듯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꼭 평온함만이 아니었다. 백치의 희고 허전한 얼굴이 아닌,
무엇인가 분명 의미를 담고 있는데도 딱히 해독해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난해한 얼굴 중에서 유일하게 말을 하는 것은 눈이었다.
그러나 그 눈마저도 어떤 확실한 언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슬픔이 자욱했고, 혼미하게 흔들렸고, 무언가를 애써 호소하는 것 같았을 뿐이다.
왜 이 여자는 나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일까.
정하섭은 이 느낌을 물음으로 바꿀 수는 없었다.
흐린 달빛이 어려 있는 소화의 고운 얼굴은 신비스럽게 아름다워 보였고,
희디흰 갈꽃의 흔들림 같은 그녀의 슬픈 눈은
그의 가슴 한복판에 모닥불을 지피고 있었다.
그의 식은 욕구는 새로운 충동으로 불붙어 올랐다.
[정하섭] "소화..."
정하섭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자신의 손아귀에 새로운 힘을 가했다.
그러면서 정하섭은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에 놀라고 있었다.
전에는 자신의 마음 그 어느 구석에 기억되고 있었는지조차 모를 이름이었다.
그런데 막상 불러놓고 보니 전혀 생소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오래고 먼 옛날부터 불러온 이름처럼
따뜻한 친숙감으로 마음에 감겨 들었다.
정님이의 얼굴 위에 겹쳐지고는 하던 소화의 얼굴...
그 사춘기의 외롭게 뜨거웠던 피 속에
소화의 이름을 남몰래 잠재웠던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무당의 딸이다, 무당의 딸이다, 스스로에게 일깨우며
소화의 모습을 의식 밖으로 몰아내려고 괴로워했던 그때부터
벌써 운명의 연습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하섭은 자신이 가담하고 있는 운동과는 생리가 맞지 않는
'운명'이라는 말에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않은 채
그녀가 이끄는 대로 문지방을 넘어섰다.
그녀가 아무런 주저없이 신당의 문을 열었을 때
정하섭은 왈칵 두려움이 끼쳐오는 것을 느꼈었다.
그 네들의 신을 모신 방에서 그 짓을 하면...
그때 끼쳐오는 두려움은
이성적 판단이나 논리적 비판으로 물리쳐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어떤 신성한 대상을 모독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받게 되는 초인간적인 재앙을 무서워하는 본능적 잠재의식의 발로였다.
그리고, 자신을 그 방으로 이끌어 가는 그녀의 태도에 불현듯 의혹이 솟았다.
이 여자가 겉 모양만 처녀로 꾸몄을 뿐이지 남자를 많이 경험한 것이 아닐까.
그건 순간적 욕구만으로 여자를 소유하고자 하면서도
그 여자가 처녀이기를 바라는 남성의 이기였다.
그 두 가지 이유로 비롯된 거부감을 그녀의 한마디가 깨끗하게 씻어낸 것이다.
다 신령님 뜻인디...,
그녀의 이 한마디는 부처님 아래 무릎 꿇은 불교도의 합장이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새기는 크리스찬의 맹세와
그 순수나 진실의 밀도가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아니, 그녀로 하여금 이름을 빌어 하는 그녀의 말은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몇 갑절 더 순수하고 진실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자신과의 관계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정하섭은 어렵지 않게 파악했고, 신령님의 뜻으로 행동하고 있는 그녀가
자신의 처녀를 제물로 내놓은 것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싶었다.
묽은 어둠이 가득한 방안은
신당답게 오랜 세월에 걸쳐 타올랐을 향내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웃목에는 신단이 꾸며져 있었고,
그 좌우로는 굿판을 차리는 데 소용될 도구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 것들은 어둠 속에서 형체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말이 있어서인지, 그것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서인지
정하섭은 아무런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어둠으로 치장된 밀폐된 공간에 힘입어 남성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아랫목에 깔린 요 위에 앉아 그때까지 신고 있던 구두를 서둘러 벗었다.
그리고 웃 저고리를 벗다가 아무 기척이 없는 소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멈칫했다. 그녀는 벽을 바라보고 앉아
소리없이 저고리를 벗어내고 있는 참이었다.
그 어둠 속의 몸짓은 그를 흡입하는 걷잡을 수 없는 마력이었다.
그의 전신의 피가 뜨거운 기름으로 변했다.
그 뜨거운 기름은 전신 마디마디에서 불꽃으로 타올랐다.
수천의 불꽃은 일시에 그녀를 향해 뜨거운 혀를 내밀었다.
그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의 손에는 치마 속에 감추어진 그녀의 젖 무덤이 크게 잡혔고,
그녀의 몸은 놀란 경련의 물결을 일으키며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녀의 귀 언저리에 닿아 있는 그의 코에는 그녀의 체취가 가득했다.
그는 들꽃냄새를 거칠게 빨아들이며 그녀를 더 깊게 포옹했다. 그녀는
미약한 한줄기 바람의 힘에 순종하여 떨어짐을 짓는 꽃잎처럼 요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허기진 손놀림에 따라
그녀의 껍질이 하나씩 하나씩 그녀를 떠나갔다.
껍질이 다 잃어버린 그녀는 마침내 알몸이 되었고,
묽은 어둠이 그녀의 부끄러운 나신을 가리는 옷이 되었다.
그녀의 젖 무덤에 얼굴을 묻은 그는 오로지 배고픈 넋일 뿐이었다.
그는 더 짙은 들꽃냄새에 혼미하게 취해가는 한 마리 벌이었다.
어릿거리고 흔들리는 의식 속에서 그는 허물을 벗어던지듯 알몸이 되었다.
** 외로운 알몸은 그 외로움을 부릴 짝을 찾아 허둥거리는 몸짓을 지었다.
그녀는
그 누구에게서도 배운 바 없는 몸짓을
최초로 지으며
그의 편안한 자리가 되고자 하고 있었다.
그녀는 뜨거운 불덩이가 전신을 태워오는 현기증을 느꼈고,
그 현기증이 불똥으로 퉁겨지는 아픔을 어금니 사이에 물었다.
그녀는 한사코
신음을 어금니 사이에 물어
입 밖으로 새나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자신의 처녀가 떠나가는
마지막 몸짓으로 남기는 통증을 인내하며
사무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건 울음이 아니었다.
슬픔도 아니었다. 긴긴날 동안 사무쳐왔던,
바람으로만 띄어 보냈던 안타까움이
비로소 매듭을 이루는 희열의 언어로,
기쁨의 소리로 흐르는 눈물이었다.
안개의 희뿌연함으로,
아지랑이의 어릿거림으로, 바람에 휩쓸리는 꽃밭의 어지러움으로 엇갈리는 의식 속에서 그녀는 손바닥에 두 개의 비파를 올려놓고 있는 소년을 만나고 있었다.
소년은 황금빛 비파를 두 개 다 선물하고자 했고,
소녀는 겁나고 부끄럽고 고마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한 채 비파 하나만을 갖고자 했었다.
소년은 그 마음을 선뜻 받아들여 주었고,
소년은 무당의 딸과 함께 아무런 스스럼 없이 그 비파를 먹지 않았던가.
그 소년에게 자신은 자신의 처녀를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은혜갚음이 아니었다.
빛 갚음은 더구나 아니었다.
먼먼 세월의 굽이를 지나오면서도
잊혀지지 않고 변하지 않은 채 쏠려간 마음은 무었이 었을까.
그건 정처없이 불어간 한 줄기 바람이었다.
그건 방향도 모르고 떠나는 한 덩이 구름이었다.
그건 밤마다 피 토하며 울다 지쳐
제 피를 되마시며 우는 풀꾹새의 울음이었다.
그는 끝없는 벼랑으로 떨어져 내리는 허탈감에 침몰하며 그녀를 버렸다.
아슴한 그 허탈의 골짜기로 떨어져 내리며 그는 문득 성욕이란 무엇인가..
혐오감 짙은 회의에 부딪혔다.
그는 매번 침몰하며 똑같은 회의에 빠지고는 했다.
그건 침몰만이 아니었다.
하얀 증발이었다.
공백의 철저한 분해였다.
실체가 완전히 타버린 자리에 남는 것, 성욕은 허무의 재였다.
그건 완전한 허무의 재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완전한 허무의 재가 다시 불길로 살아나는가.
그 반복이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충동의 불길이 되는 생명력은
어디서 생성되는 것인가.
어느 시인은,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라고 읊었다.
그 깊고 난해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건 그로서도 풀 수 없는 영원한 숙제였다.
그는 막연하게나마 삶이라는 것도 성욕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식의 공백상태에 빠질 때가 간혹 있었다.
자신이 골몰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것이
성욕 같은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그는 이런 난데없는 의문에 부딪히며 얼마나 당혹하는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의 성장과정을 에워쌌던
부르주아적 환경에 오염된 자신의 의식을 힐난하듯 매질하는 고통을 겪고는 했다.
그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리고 의지의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수마가 덮쳐왔다.
그건 재로 변한 성욕이 일으키는 언제나 똑같은 증상이었다.
그 변하지 않는 두 가지의 욕구는,
성욕으로 재가 된 것은 의식이지 육체가 아니라는 증명을 하려 들었다.
그는 차가운 물을 한 사발 들이켜고
깊은 잠을 자고 깊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물심부름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뻔뻔스럽게 행동하지 않으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갇혀 있을 감정의 울타리를 행여라도 다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 동안의 여자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도
그녀가 처녀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이 짐이 됨을 느꼈다.
어찌하여 그녀는 예비했던 것처럼 자신의 처녀를 내놓은 것일까.
그걸 물어야 될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며
그는 거센 물결처럼 덮씌워오는 잠의 수렁을 벗어나려고 애썼다.
그는 가까스로 그녀 쪽으로 돌아누웠다.
어느새 옷을 챙겨 입은 그녀가 벽을 향해 앉아 있는 뒷모습이
잠의 안개로 뿌옇게 흐려진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잠을 쫓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는 것이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고 느껴졌다.
그녀는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하섭은 소리없이 울고있는 그녀의 감정의 여울이
자신의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것을 여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소화의 허리께로 팔을 뻗쳤다
손이 허리에 닿자 그녀는 흠칫 놀랐다.
[정하섭] "소화..."
그는 그녀의 허리를 꾹 눌러잡으며 나지막하게 불렀다.
[정하섭] "나, 묻고 싶은 말이 한 가지 있소.
내 느낌으로는 소화가 나를 남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이라면 무슨 이유 때문이오?"
[소화] "..."
소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제 마음을 아셨으면 됐습니다.
아무것도 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대답할 게 없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하섭] "난 같은 말 두 번씩 묻는 걸 젤 싫어하는 성미요."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고,
그녀의 마음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갑자기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구원처럼 떠오른 말이 있었다.
[소화] "다 신령님 뜻이구만요."
그녀는 눈을 꼭 내려 감으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정확한 대답이 아닌 것은 분명했지만 더이상 마땅한 대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건 필경 신령님의 뜻이었을 것이고, 신령님의 뜻이아니고서야
자신의 마음이 그토록 오래고 긴 날들을 줄기차게 지켜냈을 리가 없었다.
[정하섭] "다 신령님의 뜻이라...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이 요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함축성 있는 대답으로 우선 부담감을 덜기로 했다.
몸을 허락한 남자를 맞 바라보지 못하고
등돌려 벽을 대하고 있는 여자에게 더 이상의 말을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일 것이었다.
다 불타버린 성욕의 잿더미 위에
밤길 60리를 걸어온 피곤까지 겹쳐서 잠은 소나기로 쏟아져 내렸다.
그는 새벽닭 울음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잠의 수렁 속으로 깊이 깊이 빠져들었다.
소화...
얼마나 고운 이름인가 얼굴만큼 곱고 아름다운 이름이다.
하이얀 꽃, 그 누가 이런 이름을 지어준 것이었을까.
그 뜻이 왜 외롭고 슬픈 느낌을 줄 까.
그녀가 무당의 딸이어서 그런가...
그는 이 생각을 끝으로 농밀한 잠에 완전히 함락되었다.
정하섭은 금세 코를 골기 시작했다.
소화는 서둘러 반닫이 위의 이불을 끌어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채, 그의 알몸을 이불로 덮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조심스러운 눈길을 정하섭의 얼굴로 보냈다.
그녀는 새롭게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을 의식했다.
그녀는 섬세한 눈길로 정하섭의 잠든 얼굴을 더듬어나갔다.
저 사람이 바로 자신의 옆에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전혀 현실 같지가 않았다.
그는 항시 멀리 있음으로써 자신의 가슴에는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와 더불어 있기를 소망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죄 됨이라 여겼었다.
자신은 무당의 딸만이 아니었다.
열일곱 나이로 대물림 굿을 받아 무당이 된 몸이었다.
어찌 감히 상상 속에서만이라도 그와 더불어 있기를 소망할 수 있었으랴.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은
꼭 꿈속인 것처럼 자신의 옆에서 저리도 곤한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밤중에 느닷없이 방문을 잠아 흔들었을 때의 놀라움보다도 방문을 열고 나서
그 사람이 바로 정하섭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의 놀라움은 얼마나 컸던것인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신령님만을 부를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도, 그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도,
다 신령님의 뜻과 권능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믿었다.
다른 말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어린정하섭] "니같이 이뿐 애가 왜 무당딸이 됐는지 모르겄다."
소년은 불쑥 말하고는 비파 껍질을 담장 너머 어둠 속으로 내던졌다.
그 말이 가슴을 치고 지나가던 아픔과
눈물이 울컥 솟아오르던 그 때의 슬픔을 그녀는 잊어본 적이 없었다.
니같이 이뿐 애가 무당 딸이 아니었으면.. 이건 그녀가 받은 최초의 관심이었고,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마지막 마음이었다.
그녀가 대물림 굿을 받게 되었을 때
소년의 그 말은 달구어진 인두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얼마나 뜨겁게 지짐질 했던가.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어 쾌자 자락이 찢어져나가라 신 춤을 추었던 것인데,
그것이 어찌 춤일 수 있었던가.
대물림 굿을 끝낸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현부자의 손길이었다.
현부자가 굿판을 푸지게 차려준 것도 예사로운 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 굿판만이 아니라
현부자가 그네들에게 베푼 경제적 혜택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화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소화] "엄니, 그렇크롬 뜻뜨미지근허게 말허지 말고
딱 부러지게 말을 혀보란 말이시."
그녀는 어머니를 다그쳤다
[소화모친] "금메 말이다, 이 엄씨가 무신 말을 더 하란 것이냐.
나도 새중간에 기어서 더 못 살것다와."
어머니는 더럽고 추하게도 현부자와 이미 묵계를 한 눈치였다.
무당의 운명을 타고난 것도 서러운데,
무당의 쳐녀성은 한낱 부자의 노리개로 취급된다는 것이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현부자 보다도 어머니가 더 밉고 저주스러웠다.
[소화] "엄니 맘대로 해봇씨요.
그 영감탱이 헌테 날 완력으로 넘길란지도 몰르는디,
고렇게만 혔다 허먼 워찌 되는지 알제라?
그날로 나 팍 죽어 뿔 것이오. 나는 절대로 그리 더럽게는 안 살 것잉께."
그녀는 이빨까지 앙다물어 보였다.
[소화모친] "음마, 음마, 남원골 춘향이 절개 또 한나 나왔네 그랴.
말이 그렇제 죽기가 워디 그리 쉰 줄 아냐?"
어머니는 눙치고 들었다.
[소화] "그렇게 얼렁 한분 해봇씨요. 나가 팍 죽어뿌는지 못 죽는지 보게.
[소화모친] " "워메, 워메, 저 년 사람 잡겄네에.
눈에 시퍼런 불꺼정 킴스롱 저년 독부리는 것 잠 보소
알 겄어, 니 뜻대로 혀. 니 뜻대로."
어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단념을 하려는 눈치였다.
그녀는 말뿐이 아니었다.
사태가 더는 피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면 진정 죽어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고,
무슨 수완을 부려 현부자의 마음을 돌렸는지 알 수 없었다.
현 부자네가 도깨비 장난에 홀린 것처럼 갑작스럽게 망했을 때
그녀는 그 누구보다고 기뻐했었다.
그녀는 줄곧 위태위태한 마음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정하섭은 두 팔을 휘저으며
울음도 비명도 아닌 소리를 다급하게 지르고 있었다.
흉악한 꿈에 쫓기고 있거나 가위에 눌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를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팔을 뻗쳤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그의 몸 가까이에서 멈춰지고 말았다.
감히 그의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가 맨몸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계속 괴로운 몸부림을 하고 있었고,
그녀의 손은 허공만을 자꾸 잡아 쥐며 가늘게 떨렸다.
잡귀에게 잡히면 안되는데.. 혼을 빼앗기면 안 되는데...
그녀는 안타까움으로 팔을 뻗쳤다가 자기의 가슴을 뜯다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잡귀를 물리쳤는지 그는 잠시 후에 편안한 잠을 이어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끌어당겨 그의 어깨까지 덮었다.
그러다가 그의 이마에 맺혀 있는 땀방울을 보았다.
흰 광목수건을 꺼냈다. 조심조심 땀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비로소 정하섭이라는 남자의 생김새를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희고 넓은 이마, 숱 많은 새까만 눈썹, 산줄기처럼 곧게 뻗어 내린 콧등,
골 깊은 인중 아래 뚜렸한 윤곽의 입술...
세월은 한 소년을 이렇듯 준수한 남자로 바꾸어놓았고,
그 남자의 땀을 다 닦아낸 소화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그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그 모습은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이 사람은 어젯밤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새벽녘에 들이닥친 것으로 보아 사람의 눈을 피해 밤새껏 먼 길을 걸어온 것이 분명했다.
[정하섭] "그렇소, 제대로 맞췄소. 내가 바로 빨갱이요."
서슴없이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 귀를 쟁쟁하게 울려왔다.
그는 왜 좌익을 하는 것일까.
어젯밤 그의 앞에 죄인처럼 쪼그리고 앉아 잠깐 생각해보았지만,
이제 다시 곰곰히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구를 위해서 이 고생을 하는 것일까.
그는 어째서 가난하고 불쌍한 농부나 노동자편을 들게 되었을까.
그런 마음은 어디서 생긴것일까.
아무것도 부러운것이 없이 산 부자집 아들의 마음에
왜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을까.
이런 꼬리를 무는 의문을 거머잡듯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건, 자신에게 황금빛 비파를 내밀던 그의 소년 적 모습이었다.
철 없을 어린 나이에
부자집 아들이 무당의 딸에게 그런 마음을 나타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남다른 인정을 가진 것이었을까.
그 인정스러움이 어른이 되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편을 드는 좌익이 되게 한 것은 아닐까.
[정하섭] "안돼, 안돼..."
정하섭은 팔을 휘저으며 잠꼬대를 했다.
그녀는 소스라쳐 생각에서 깨어났다.
창호지문에 희뿌연 빛살이 번지고 있었다. 먼동이 트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치마폭을 모아 잡으며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서둘러 아침밥을 지어야 했다.
방문을 반쯤만 열고 마루로 나선 그녀는 재빨리 방문을 닫았고,
그대로 문고리를 잡고 서서 사방을 빠른 눈길로 살폈다.
자신도 모르게 취해진 경계였다.
그녀는 문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부엌에서 일을 하는 동안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어 그 사람을 잡아갈 것만 같았던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끔찍한 일이었다.
처마 밑을 찾아든 하찮은 날 것 하나라도
상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산신령님의 뜻이었다.
하물며 그는 사람이었고, 몸과 넋을 섞어 나눈 긴긴 인연의 매듭을 진 사이가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 어찌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할 지 모를 위험이 미치게 할 것이랴.
그녀는 자물쇠를 채우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집에는 자물쇠가 없었다.
굿판을 따라 두 식구가 며칠씩 집을 비우는 일이 허다했지만
어느 때고 자물쇠로 문을 채운 일이 없었음을 뒤늦게 상기했다.
살림이 가난해서 문을 채우지 않은 것이 아니다.
세끼 밥 끊일 쌀은 없어도 도둑이 훔쳐갈 것은 있다고 했다.
번들번들 윤나는 살림은 아니었지만 결코 궁색한 살림살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쌀독 밑이 드러나는 일 없이 쌀은 늘 그만하게 차있었고,
도둑의 손을 탈 만한 물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자물쇠를 채운 일이 없었고, 도둑을 맞은 일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때 그녀에게 깨달음이 왔다.
신령님의 도량인 탓이었다.
자신들은 신령님의 영험을 믿었던 것이고,
도둑들은 신령님의 영험을 두려워해 감히 도둑질할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그녀는 그제서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신령님은 분명 그 사람을 보살피실 것이고,
그 누가 감히 신령님의 도량을 더럽힐 수 있으랴 하는 믿음이 그녀의 가슴을 채웠다.
그녀는 잡곡을 빼고 쌀만으로 밥을 안쳤다.
그리고 불땀이 좋은 바싹 마른 삭정이만을 골라 불을 지폈다.
불길은 곧 너울너울 춤을 추며 타올랐다.
그녀는 불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불길을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함께 타오르며 넋이 가닥가닥 불길의 몸부림을 닮아갔다.
붉은색도, 주황색도, 황금빛도 아닌 불길의 색깔.
그 색깔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싱싱하고, 가장 깨끗한 색깔이었다.
그녀는 불길을 보고 있노라면 전신이 서서히 더워지고,
마디마디에서 새순이 돋듯 기운이 살아나 신춤을 추게 되는 것이었다.
불길처럼 뜨겁게, 불길처럼 곱게, 불길처럼 진하게 신춤을 추다가
추다가 불길처럼 아무런 흔적도 없이 허허한 공간으로 사라져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맑은 소원을 가로막고는 하는 것이 있었다.
그 사람이었다. 아니, 그 사람에게로 향해 있는 또 다른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 사람을 위해 밥을 짓게 되다니...
이제 온 넋을 다 태우고, 온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곱고 진하게 한바탕 신춤을 추다가 불길처럼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한이 없으리라 싶었다.
넋 놓고 불길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밥물이 넘쳐흘러 솥전에서 피지지직 소란스런 소리를 내며 말라붙고 있었다.
그녀는 치마귀를 잡아 눈물을 훔치고는
부지깽이로 삭정이가 탄 작은 불덩이들을 솥 아래로 긁어모았다.
그리고 살강으로 돌아서 작은 함지박을 끌어냈다.
그 안에서 달걀 하나가 덩그러니 들어있었다.
그만 그녀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두 개쯤 있으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간 고등어 한 손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쇠고기 반찬을 올리지 못하고 닭을 잡을 수는 없다하더라도 이 꼴이 무엇인가.
그녀는 안타까웠다. 찬바람이 일기 시작했으나 꼬막이 제맛이 날 땐데,
무시로 드나들던 그 수선스런 꼬막장수 여편네가 이런 때 나타나면 좀 좋으랴.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놀라며 밖으로 눈을 던졌다.
지금은 아무도 와서는 안 된다. 사람이 아니고 강아지라도 얼씬거려서는 안 된다.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그 사람을 생각하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달걀을 사발 가에 톡톡 쳐서 조심스럽게 깼다.
그리고 흰자와 노른자가 골고루 섞이도록 숟가락을 빨리 돌려 저었다.
보시기 아래다 새우젓을 반 숟갈쯤 놓고 달걀을 부었다.
그 위에 가는 파를 송송 썰어 뿌리면서도,
달걀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하는 아쉬움을 버리지 못했다.
그녀는 김이 얼굴에 쐬지 않도록 솥 뚜껑을 천천히 밀어 열고
후후 김을 불어내며 보시기를 솥 가운데다 놓았다.
밥이 뜸이 드는 동안 달걀은 말캉하게 잘 익을 것이다.
솥뚜껑을 닫고 나서 그녀는 빈 손바닥을 맞비비며 선 자리에서 종종거렸다.
색다른 반찬을 더 만들 수 없는 것이 그렇게 서운하고 허전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읍내 어물전이나 정육점을 다녀올 수도 없었다.
읍내는 오리길이 넘었고,
지금 형편으로는 가까운 아랫동네도 다녀올 처지가 못 되었다.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필경 오래 머무르지 않고 떠날 것이다.
어쩌면 아침밥만 먹고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싱싱한 꼬막이라도 한 접시 소복하게 올려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녀는 꼬막무침만은 그 어떤 음식보다 자신있게 해낼 수 있었다.
꼬막은 벌교 포구의 차지고 질긴
넓고 넓은 뻘 밭의 특산물이어서
벌교 여자치고 꼬막무침 못하는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유독 꼬막을 좋아했고,
나이 들어 부엌일을 배우면서부터 꼬막무침에 신경을 쓰다 보니 남다른 맛을 내게 된 것이다.
[소화어미] “워메 내 새끼 꼬막 무치는 솜씨 잠 보소.
저 반달 같은 인물에
손끝 엽렵허기가 요리 매시라운 니는
천상 타고난 여잔디.
금메, 그 인물, 그 솜씨 아까워 워쩔끄나와."
어머니를 섧고 슬프게 했던 꼬막 무치는 솜씨였다.
꼬막은 다른 조개들과는 달리 다루기가 꽤는 어려웠다.
모래밭에 사는 조개들과는 달리 뻘 밭을 집으로 삼고 사는 꼬막은
온몸에 거무스름한 갯뻘을 맥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씻는 것부터가 다른 조개에 비해 힘과 정성이 몇 곱으로 들었다.
힘과 정성이 몇 곱으로 드는것은 갯 뻘이 묻어서만이 아니었다.
그 껍질의 생김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조개는 그 껌질이 매끈거리게 마련인데
꼬막의 껍질은 수없이 많은 골이 패어 있었다.
기와 지붕과 똑같은 골이 쥘부채의 살처럼 퍼져 나가고 잇었다.
그 골마다 갯뻘이 끼여 있으니 씻는 것만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 다음이 삶는 일이었다. 솜씨는 이때부터 필요한 것이었다.
감자나 고구마를 삶듯 해버리면 꼬막은 무치나 마나가 된다.
시금치를 데쳐내듯 핏기는 가시고 간기는 그대로 남아 있게 슬쩍 삶아내야 하다.
그 슬쩍이라는 것이 말 같지 않게 어려운 이이었다.
알맞게 잘 삶아진 꼬막은 껍질을 까면 몸체가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고,
물기가 반지르르 돌게 마련이었다.
양념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대로도 꼬막은 훌륭한 반찬 노릇을 했다.
간간하고, 쫄깃쫄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하기도 한 그 맛은
술안주로도 제격이었다.
그래서 어느 잔칫집에나 삶은 꼬막이 큰 광주리에 그득하게 담겨 있게 마련이었다. 술상머리에 한 사발씩 퍼다 놓으면 제각기 필요한 만큼 까먹는 것이다.
콩나물이 그러하듯 꼬막도 잔칫집의 흔하고도 소중한 반찬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편법이었다.
제대로 꼬막맛을 갖추려면 고추장을 주로 한 갖은 양념의 무침을 거쳐야 한다.
이 단계에서 꼬막 맛도 제각각이었다.
벌교 포구의 갯뻘이 끝이 없이 넓듯
벌교에서 꼬막은 흔해빠진 물건이었다.
그러나 감칠맛 나는 꼬막무침을 맛보기는 흔한 일만은 아니었다.
꼬막 무침을 제대로 하는 처녀라면
다른 음식솜씨는 더 물을 게 없다는 말이 상식화된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고흥 쪽 해변에서도, 보성만 일대에서도 꼬막은 났다.
그러나 벌교 꼬막에는 그 맛이 미치지 못해
옛날부터 타지 사람들은 먼저 알고 차등을 매겼다.
벌교에서 물 인심 다음으로 후한것이 꼬막 인심이었고,
벌교 5일장을 넘나드는 보따리 장꾼들은
장터거리 차일 밑에서
한 됫박 막걸리에 꼬막 한 사발을 까는 것을 큰 낙으로 즐겼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제 1 부 한의 모닥불
4장. 소화,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무당 (2)
1권 4장(1) 소화,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무당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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