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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4장 소화,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무당

나무 심고 책읽는...... 꿈은계속된다 2023. 4. 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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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제 1 부 한의 모닥불

  

    4장. 소화,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무당  (2)

 

https://youtu.be/DHgg1ibJzxc

1권 4장(2) 소화,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무당 로 이어집니다

 

 

소화는 부엌을 나와 신당 쪽으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문 가까이 귀를 기울였다. 코 고는 소리만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왔다.

그녀는 순간 마음이 아늑해지는 걸 느꼈다.

그 느낌이 스스로에게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었다.

 

햇살은 없었지만 날은 완전히 밝아 있었다. 

참새떼들은 대숲에서 짹짹거리고 퍼득거리는 소리가 부산했다.

아침 냉기 속에 그 부산스런 소리가

맑고 깨끗한 유리알들이 구르는 것처럼 경쾌한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겨울 설한풍 속에서도 청청한 잎을 지키는 대나무지만 아래쪽 잎들은 10월 하순의 냉기에 누릇누릇 변색해가고 있었다.

 

그녀는 옷깃을 여미며 부엌으로 가려다가 안방에 눈을 주었다.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서렸다.

그 사람과 안방을 나온 다음 벌써 몇 시간째나 어머니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죄스러운 생각이 가슴을 채웠다.

어머니는 그 동안 소변을 참다 못해 옷과 요를 적셨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어머니는 사지를 못 쓰고 말을 못할 뿐

청각이나 시력, 생각하는 것은 정상에 가까웠다.

 

어머니는 풍을 맞아 몸져누운 다음부터 눈이나 표정으로 의사표시를 해왔다.

그녀는 머리를 치는 충격을 느꼈다.

그 사람과 함께 방을 나서기 전에

어머니가 잠이 깨어 있었는지 아닌지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나타난 그 사람이

문을 흔들고, 방으로 들어오고, 성냥을 켜 담뱃불을 붙이고,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고,

그런 일들이 큰 소란 속에서 이루어 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동안 어머니가 잠들어 있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깨어 있었을 확률이 더 컸다.

몸져누운 다음부터는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어머니였다.

만약 어머니가 잠이 깨어 있었더라면..

그녀는 죄의식에 몸을 죄어 뜨리며 바르르 떨었다.

 

누구인지 모를 남자에게 딸이 끌려나가고,

붙들려 해도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고,

소리치려 해도 말을 듣지 않고,

어머니는 얼마나 애가 타고 얼마나 미칠 것 같았을까. 혹시 그 동안에 기다리다가..

불길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허둥지둥 방문을 열었다.

 

[소화]  "엄니, 엄니이!"

그녀는 다급하게 어머니를 부르며 아랫목으로 기다시피 했다.

어머니는 눈을 번히 뜨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 그 눈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핏발이 서리고,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어머니는 잠이 깨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 동안 공포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했다.

내가 미친 년이다. 내가 미친 년이다.

그녀는 죄스러움으로 전신이 뒤틀렸다.

 

[소화]  "엄니, 나 여깄어. 나 왔당께."

그녀는 울먹이며 어머니를 흔들었다.

어머니 눈에 눈물이 번졌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이 둔한 경련을 일으켰다.

 

[소화]  "엄니, 나 암시랑 안 혀. 걱정 하지 말어. 아무일도 웂엇응께." 

 

어머니는 더디게 눈을 껌벅였다.

알았다는 표시였다.

어머니의 두 눈에서 옆 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손등으로 그 눈물을 닦아내며,

신당에서 그 일을 저지른 것을

어머니가 눈치챘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가슴벽을 쿵쿵 치기 시작해서

차츰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엇다. 

그때 신당 쪽에서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퍽퍽 둔하게 들려왔다.

그녀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빨리 어머니를 살폈다.

어머니의 눈빛은 어느새 겁에 질려 있었고,

눈 가장자리에 물 비늘 같은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소화]  "엄니, 엄니, 암시랑 안 혀. 

숭헌(나쁜) 사람이 아녀. 엄니도 보먼 다 아는 존 사람이여."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성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바로 술도가집 아들이라고 밝히지는 못했다.

  다시 벽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화] "엄니, 안심혀.    얼렁 가보고 올 팅께."

어머니의 소변자리를 살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어느새 방문을 밀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년이 미친년이다, 미친년이다, 자신을 힐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신당 문을 빼꼼하게 열었다.

좁은 시야에 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하섭]   "그리 서 있지 말고 빨리 들어와 문 닫으시오.

아니, 찬물 한 사발 먼저 주시오." 

 

그녀는 물줄기를 받아 맴을 도는 물레방아처럼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부엌으로 내달았다   

그는 그녀가 물그릇을 방바닥에 놓기 전에 팔을 뻗쳤다.

물이 그릇을 넘쳐날 기세로 잠시 요동쳤다.

그는 사발을 받아들며 그녀에게로 시선을 쏟아 부었다.

고개를 깊게 떨군 그녀의 몸 전체는 시린 부끄러움으로 떠는 것 같았다.

무감동한 물체감으로 굳어져 있기는 했지만

보드라운 피부의 균형잡힌 그녀의 나신을 떠올렸다.

 

그는 새로운 갈증을 느끼며 단숨에 한사발의 물을 들이켰다.

 

[정하섭]  "혹시 이상한 사람 얼씬거리지 않았소?"

그는 너무 오래 잤다고 생각하며 담배를 빼들었다.

 

[소화]  "아무도 없었구만요."

그녀는 '예'라고만 간단히 대답하려다가

확실함을 보이고 안심을 시키려고 굳이 그렇게 대답했다.

 

[정하섭]  "여기 말고 더 안전한 곳은 없소?"

  그녀는 얼핏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지 못했다.

 

[정하섭]  "아마 이틀 정도는 더 여기 머물러야 될 것 같소.

그 동안 맘놓고 피해 있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단 말이오."

 

그녀의 머리에 먼저 잡힌 것은

안전한 피신처가 아니라 그가 이틀을 더 머무른다는 사실 이었다.

 

[소화]  "있구만이라. 현씨네 빈 제각에 숨을 디는 얼매든지 있구만이라." 

 

그녀는 온몸이 뜨거운 기운으로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빠르게 말했다.

 

[정하섭]  "더 늦기 전에 당장 그리로 옮겨야겠소."

  그는 또 너무 오래 잤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화]  "저어, 아침 진지가 다 되았는디..."

 

[정하섭]  "그쪽으로 옮기고 나서 먹겠소."

 

[소화]  "근디..."        

그녀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소화] "빈 제각으로 밥상 들고 댕기는 거

넘덜이 보먼 사람 숨어 있는 거 금세 눈치챌 것인디요."

 

그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안전한 장소로 옮길 생각에만 급급해서

그런 허점을 드러낸 자신의 경솔이 한심스럽고,

순간적으로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그녀의 빠른 두뇌회전이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정도라면 심부름 시키기에는 안심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정하섭]  "좋소. 아침밥은 여기서 먹어 치우도록 합시다.

그 다음은 옮기고 나서 생각하고." 

 

그는 어젯밤보다도

농도와 색깔이 다른 감정의 줄기가 그녀에게로 쏠리는 걸 느끼며 도로 주저앉았다.

 

정하섭은 현씨네 제각 아래채인 별장의 여닐곱 개가 넘는 방 중에서

후원 쪽에 붙은 것을 골랐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었는데,

뒷담에는 산으로 바로 연결되는 쪽문이 나있었던 것이다.

 

[소화]  "방이 요리 찬디..."

  소화는 먼지가 뿌옇게 앉은 방바닥에 손을 대보며 혼잣말처럼 걱정을 했다.

 

[정하섭]  "불을 피워선 안돼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소화]  "생솔가지나 볏짚 안 때고

뽀짝 마른 삭쟁이를 때먼  연기가 안 나는디요."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정하섭]  "아무리 삭정이라도 불은 이따가 어두워진 다음에 때도록 하시오.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있소."

 

당장 불을 지피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을 빨리 단념시켜야 했다.

그는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며 그녀에게 방을 훔치라고 일렀다.

 

그는 간단하게 적었다.

 

어머님, 평안하신지요. 긴 인사 줄이옵고,

소자 하섭이 여기 보내는 소화에게 은신해 있습니다.

어머님도 짐작하시겠지만 지금 소자는 쫓기는 몸입니다.

절대로 여기 오셔서는 안됩니다.

제가 나타났다는 눈치를 보여서도 안됩니다.

모든 연락은 소화를 통해서만 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 돈이 급합니다.

어머님이 장만할 수 있는 데까지 해주십시오.

물론 아버님이 아셔서는 안됩니다.

돈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모레 저녁에는 세상없어도 여길 떠나야 합니다.

 

어머니, 절대 여기 오시면 안됩니다.

제가 다치게 됩니다.

 

정하섭은 글을 마치며

코허리에 매운 바람이 찡하니 맺히는 걸 참아내느라고 잠시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어머니는 도무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다.

혁명의 열기나 정열마저도 어머니라는 이름은 눈물로 녹이려 든다.

어머니라는 호칭은 여자만이 갖는 것인데 정작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다.

어머니, 그 슬픈 이름은 항시 새로운 그리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정하섭은 편지를 두 번 세 번 꼭꼭 눌러 접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정하섭]  "소화, 이 편지를 지금 곧 우리 어머님한테 전하시오, 꼭 어머님한테.

식구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알아선 안돼오.

그리고 소화한테 일러두겠소.

절대로 당황하지 말고, 긴장하지 말고, 평소대로 태연하게 행동하시오.

만약 이 편지가 경찰의 손에 들어간다면 난 죽게 되는거요.

 

총살을 당할 것이오."

 

정하섭은 일부러 끝말에다가 힘을 주어 잔인하게 말했다.

그 효과는 소화가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붉은 입술에 박힌 반쯤 드러난 하이얀 이빨 두 개가 그의 관능을 꿈틀 자극했다.

 

[정하섭]  "자, 빨리 다녀오시오."

그는 자신의 어이없는 생각을 떼쳐내듯 편지를 불쑥 내밀었다.

편지를 받아드는 그녀의 손끝이 잠자리 날개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정하섭] "그리고, 읍내 사정이 어떤지 눈치껏 살피고 오시오.

특히 경찰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녀는, 그 사람이 자신을 안심하고 믿게,

자신이 그 사람을 위해 빈틈없이 일을 해낼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려고

분명히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입안에서만 맴돌았을 뿐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그녀는 그 순간 냉기와 열기가 엇갈리는 기묘한 체온 변화를 겪고 있었다.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한줄기의 냉기가

머리에서부터 등줄기를 훓어내려 다리까지 쭉 뻗쳐 내렸다.

그 냉기가 발 끝에 부딪치는 순간 뜨거운 불길이 확 일어났다.

그 불길이 위로 치뻗어 오르면서 전신은 열기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그녀가 굿판에 설 때만 경험하는 발열현상이었다.

징과 바라의 끈끈한 울림이

교미하는 뱀의 또아리처럼 칭칭 감겨 엉키면서

그 열기는 머리로 모아져 소용돌이치고, 시야에 뿌연 안개가 끼어올 때, 

어허얼싸, 자신도 모르게 외쳐대며 굿 춤은 폭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을 상대로 이건 어인 일인가.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바르르 떨었다.

 

[소화]  "댕겨올랍니다."

그녀는 굿 춤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품에 와락 안기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발등을 가린 치마 속에서 그녀의 두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정하섭]  "명심하시오. 당황하지 말고 태연하게 행동해요."

 

그의 굵은 목소리를 들으며 댓돌로 내려섰다.

 

그녀는 가슴이 벌떡이는 것을 진정시키려고 심호흡을 했다.

며칠 전에 보았던 읍내의 살풍경이 눈앞에 어릿거렸다.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소화다리 아래 갈 숲에 내 던진듯 널부러져 있는 시체를 보았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생목이 치밀고 끔찍스러워 읍내 발걸음을 끊고 말았다.

읍내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그 살벌한 난리가

다 남정네들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사실 외딴집에 들어앉아 있으면

그런 것은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먼 세상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 끔찍한 일이 갑자기 자신의 일로 바뀐 것이다.

자신은 이제 그 난리의 중심을, 즐비한 시체 사이를 걸어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생목 치밀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가리라고,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그녀는 스스로에게서 발견하고 있었다.

 

가을 햇살이 후원 가득 차고 있었다.

여름 햇살의 열기가 다 바랜 가을 햇살은 미지근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여름 햇살이 화살처럼 내리 꽂힌다면

가을 햇살은 나비의 날개짓처럼 내려앉는다.

노릇노릇 변색한 잔디 위에 가을 햇살은 골고루 내려앉는다.

후원에 가득한 온기가 노란 병아리의 솜털처럼 보드랍고 아늑했다.

그런데, 그 보드랍고 아늑한 온기 그 어딘가에 스산한 슬픔이 있다.

그게 가을을 주도하는 가을 햇살의 체취인지도 모른다.

 

 

 

정하섭은 후원의 잔디밭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김범우] "자네 생각은 다 옳아.

그러나 그 옳은 생각의 실천이 꼭 사회주의 혁명이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네."

 

김범우 선생의 말이 가슴 깊은 골짜기에서 메아리쳐 들려왔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후원 쪽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 푸우 한숨을 쉬듯 연기를 내뿜었다.

 

 그는 김범우 선생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것만큼 그 분을 생각하는 것은 괴로움이었다.

현재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은 그 분이 굳이 만류했던 길이었다.

그분의 논리를 충분히 납득하면서도 결국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정하섭이 김범우를 가깝게 접하게 된 것은

그가 중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선생으로서였다.

 

1946년 4월 신학기에

김범우는 사회과 선생으로 학생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김범우가 선생으로 '부임'한 것이 아니라

무슨 연극무대에 오르는 것처럼 '

그   모습을 나타냈다'고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부임하기 전에 벌써 학생들 사이에는

 그에 관한 소문들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가 직계 선배라는 사실에서부터 학생들은 주눅들기 시작해서,

수많은 입을 건너면서 각색되고 윤색된 소문들이

그에게 입힐 영웅의 옷을 장만해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학생들 앞에 첫 모습을 나타냈을 때

이미 소문으로 최면된 학생들은 완전히 기가 꺾이고 말았다.

1m75가 넘는 헌칠한 키에

균형잡힌 체격이 그 영웅적 소문을 입증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몸집이 작았더라면

학생들은 소문의 기세를 반으로 뚝 꺾는 승리감을 맛보았을 것이고,

반이 남은 소문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츰차츰 그 전부의 뿌리를 들춰내려는

간질간질한 공모의 여유를 나눠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부동자세를 취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교장의 소개가 끝난 다음

김범우는 부임인사를 하기 위해 조회대로 오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학생들의 대형 사이사이에서는

두런거리는 소리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햐아, 저 키는 양코들한테도 꿇리지 않겠는데.

증말 오에스에스(OSS)대원같이 생겼다. 

근사하다, 근사해. 소문을 수긍하는 이런 종류의 수군거림이었다. 

 

그런데 조회대로 올라온 김범우는

우뚝 버티고 서더니

학생들을 좌에서부터 우로, 우에서부터 좌로 고개를 느리게 돌리며 훓어나갔다.

 

그 침묵 속의 눈초리가

커다란 빗자루가 되어 자신들의 두런거림을

삽시간에 쓸어가는 것을

학생들은 구령도 없는 부동자세를 취하며 으스스한 추위로 느꼈다.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진 운동장에 김범우의 부임인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졌다.

 

[김범우] "저는 김범우입니다.

앞으로 역사와 사회과목을 담당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학생입니다. 저는 선생입니다.

여러분은 학생으로서 최선을 다해 공부를,

저는 선생으로서 최선을 다해 지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앞으로 힘을 합쳐 해야 할 일입니다. 이상."

 

끝에 '이상'이라는 말이 없었더라면 학생들은 인사말이 계속될 줄 알았을 것이다.

학생들은 분명히 '이상'이라는 말을 듣고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학생들은 여러 가지로 당황해 있었다.

 

우선 그 인사말의 짧음 때문이었다.

교장의 훈화가 줄잡아 30분,

훈육주임이나 교무주임의 지시사항 등속이 30분,

으레 전체 조회를 섰다 하면

한 시간씩 몸 비비꼬는 것으로 습관되어온 학생들 입장에서

미처 1분이 못 되는 인사말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다음이, '나'를 '저'로 낮춰 말하는 점이었다.

교장을 비롯하여 모든 선생들은 '나'였을 뿐이다.

특히 훈육주임은 성질이 뻗치는 무슨 일이 터지는 경우에는

'이놈들, 저놈들'을 서슴지 않았고, 학생들도 예사로 들어 넘겼다.

그런데 선생이 학생들을 상대로 자기를 '저'로 낮춰 부른 것이다.

 

세 번째가 짧은 인사말의 내용이었다.

교장의 공자, 맹자, 불경, 성경 들춰대는 지루한 훈화보다도,

훈육주임의 게거품을 무는 장광설보다도

그 짧은 말은 몇 배 강한 탄력으로 가슴에 와 박히는 것이었다. 

너무 쉽고 당연한 그 말이

왜 그렇게 신선한 느낌으로,

새로판 도장을 백지에 찍듯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지 모를 일이었다.

 

김범우 선생의 진가는 그 후로 1년에 걸쳐서 천천히 그 옷을 벗어나갔다.

국어나 수학과는 달리 1주당 배정시간이 적은 그는   

많은 반을 맡아 가르쳤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직접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그의 과거를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소문이 남긴 궁금증과 갈증을 풀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더러 어떤 배짱 좋은 학생이 손을 번쩍들고,

제법 효과적인 역사공부라는 의미 부여까지 해가며 이야기하기를 종용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소문은 다 거짓말'이라고 일축해버리고는 했다.

그가 정규수업 외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정치서클에 대해서였다.

정치서클이라고 했지만 그 종류가 많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다른 학교 양상과 마찬가지로

그 학교의 학생세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 이념이었다.

반음성적인 그 힘의 파도에 비해 그에 맞서는 힘은 너무나 미미했다.

 

몇몇 선생은 감추어진 손으로 그 힘을 조종하고 있었고,

다른 대부분의 선생들은 의식적인 외면이나 기회주의적인 방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범우의 깊은 관심이란 그 세력의 파괴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반대세력을 형성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하는 일은 그 세력의 주동인물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해서,

정치의식을 버리고 학업에 전념하는 학생이 될 것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는 곧 각 학교에 퍼져 있는 사회주의 학생조직으로부터

'파괴분자,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의 설득으로 그 학교의 조직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하섭이 김범우 선생과 대면하고 앉은 것도 이때였다.

정하섭은 그 학교 좌익서클의 핵심인물이었다.

몇 차례 만난 다음부터 그는 김선생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이론으로 당할 수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설득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정하섭은 자신이 졸업반이 아니고 4학년만 되었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김범우가 순천 역전 광장에서

몽둥이를 든 네 명의 농업학교 학생들에게 둘러싸인 것은

7월의 어느 날 퇴근길이었다.

역에는 통학생들로 붐비고 있었고,

그들이 하필이면 역전을 테러장소로 잡은 것은

각 학교 학생들이 골고루 모였기 때문에 그 선전효과를 위해서라는 걸

김범우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테러의 위험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처럼 대담하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건 저돌적 사회주의가 낳은 쓰디쓴 비극이었다.

아직 스무 살이 못되고,

책을 들어야 할 손에 몽둥이를 들게 한

그 이즘이라는 것에    그는 순간적으로 치를 떨었다.

 

[김범우] "왜들 이러나!"

 

그는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엄하게 말했다.

 

[순천 농업학교 학생들] "요런 반동새끼야, 몰라서 물러!"

 

네 명은 포위를 좁혀왔다.

 

나라가 없다는 이유로

연합군 동지 자격에서 하룻밤 사이에 포로 취급을 받아야 했던

그 기막힌 서러움이 일순간 그의 전신을 차갑게 타고 내렸다.

 

아직도 나라는 세워지지 않은 채

남쪽과 북쪽은 서로 국적이 다른 군정 치하에 놓였는데,

해가 저무는 조그만 역전 광장에서

스무 살이 못 된 철부지들과

한바탕 결투를 벌여야하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 한심스러웠다.

첩보훈련에서 익힌 무술을 기껏 이런데서 쓰다니...

 

그러나 콧대는 꺾을 필요가 있었다.

이번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었다.

그때 휙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거의 동시에 그의 발이 허공을 갈랐다.

앞뒤로 몽둥이가 날아들고,

그의 팔과 다리는 무서운 속력으로 상대방의 급소를 가격하고 있었다.

단 일격씩만을 맞고 상대방들은 나뒹굴어졌고,

더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수치심을 견딜 수 없어

땅바닥을 내려다본 채 땀을 닦고 있는데

그때서야 에워싼 학생들을 헤치며 순경 둘이 나타났다.

 

[순경] "요런 빨갱이 새끼들, 선생님도 몰라보고. 잘 걸렸다."

순경들이 쓰러진 학생들의 덜미를 잡았다.

그들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어느 학생이 그들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김범우] "그대로 두시오. 얘들은 학생이지 빨갱이가 아니오. 내가 알아서 하겠소."

 

김범우는 순경들을 제지했다.

 

이 사건으로 김범우 선생이란 존재는

순천 벌교 바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수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몽둥이를 휘두르며 덤비는 네 사람을 거뜬히 물리친 무용담도 무용담이지만

학생들을 더욱 감동시킨 것은 그 네 학생을 극구 변호해서 경찰서에서 빼낸 것이었다.

그 일 처리로 하여 좌익학생들도 더 이상의 적대감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김범우 선생은 좌익에 물든 학생들을 설득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극렬한 행동을 하다가 경찰서에 붙들려 들러간 학생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학교의 구분을 두지 않고 노력했다.

좌익조직에서 보면 그는 확실히 눈의 가시였지만

그렇다고 증오스러운 적도 아니었던 것이다.

 

여름방학 동안에 여수 만성리 해수욕장에서

두 명의 학생을 구해냄으로써 김범우 선생의 신화는 극에 달했다.

100여명의 학생들이 단체 하계 수련중이었는데,

두 학생이 수영 실력을 뽐내다가 물살에 휩쓸린 것이다.

해변은 갑자기 아우성으로 들뜨다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때 김범우가 물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파고 4~5 미터의 바다에 내던져져

발로만 몸을 지탱시키며

네 명 일개 조가 고무보트를 조립해서

 500 미터 전방의 해변까지 상륙해야 하는

첩보훈련을 받은 김범우로서는 파도도 별로 없는 바다에서

조난자 두 명을 구출한다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하섭이 김범우 선생의 난처한 영향권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졸업과 함께였다.

서울로 유학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해방이었다.

정하섭은 그 분과의 공간적 거리를 멀게 유지하게 된 것을

분명 '해방'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 분의 논리 앞에서 자신의 의식이

구속감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마음은 그분이 지닌 인간적 매력에 한사코 끌려가려 했던 것이다.

 

불필요한 말은 거의 하지 않는 무게감,

세상의 이치를 훤히 아는 것 같은 해박함,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을 것 같은 겸손함,

거의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진행해가는 꾸준한 행동성,

그러나 그분의 절대적 매력은

이런 모든 것들이 모아져 이루어진 것 같은

그 어딘지 우울한 듯하기도 하고, 쓸쓸한 듯하기도 한

범접하기 어려운 사색적이고도 지성적인 분위기였다.

 

김범우 선생을 생각하는 정하섭의 의식 속에는

거의 자동적으로 염상진 위원장이 대칭으로 자리잡고는 했다.

염상진 위원장은

자신의 의지가 김범우 선생 쪽으로 흔들리지 못하게 하는

쐐기 역할을 해냈음을 정하섭은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그 깨달음이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되었고,

염상진 위원장에게는 죄의식이 되었다.

염상진 위원장이 옆을 지켜주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의지는 추호도 주춤거리지 말았어야 했다. 

다른 '동무'들처럼 김범우 선생을 가차없이 반동으로 몰아 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누구 앞에서나 태연을 가장했을 뿐

속으로는 김범우 선생의 말에 대해서도 당위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정하섭은 그런 스스로가 싫었다.

그런 양면성과 이중구조를 가진 자신의 의식이 싫었다.

 

그건 사상 무장의 나약이나

혁명의지의 박약이나

실천용기의 빈약으로 찍힐 요소였다. 

다른 그들처럼 단순해지고 싶었다.

간단하고 명료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처럼 열성적이고 싶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김범우선생]  "이 말은 자네가 제일 싫어하는 말일지 모르겠네만,

자넨 아마 광적인 사회주의자는 못될거야.

자네가 부자집 아들로서 출신성분이 부적합하다는 말이 아냐.

부디 공부에 충실하고,

하나의 행동을 선택하기 전에 열번이고 백번이고 생각이 앞서야 하네.

지금은 진정 어려운시대야.

자네 같은 젊은 피들한테는 말이야..."

 

 작별인사를 하러 갔을 때

김범우 선생이 자신의 마음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눈길을 보내며 한 말이었다.

 

정하섭은 그때 처음으로

마음이라는 것을 도둑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것이 얼마나 굴욕스럽게 기분 나쁜 일인가를 경험했다.

 

서울의 ㄱ대학 법과는

사상적으로 중무장되고 행동적으로 과격한

그야말로 골수 사회주의 자들의 집합소였다.

 

[염상진]  "자넨 지금부터 시작이다.

서울 조직은 자넬 자랑스러운 혁명의 아들로 탄생시킬 것이다.

모든 연락은 내가 취해놓았다."

 

염상진이 작별의 술잔을 들며 한 말이었다.

그 말의 효과는 정하섭이 서울에 짐을 풀고 5일 만에 나타났다.

서울의 조직이 그에게 뻗쳐온 것이다.

그들은 납치라도 하듯이 어딘지 모를 곳으로 그를 데려갔다.

 

[공산당원]  "중앙당은 염상진 동무의 추천을 접수하여

정하섭 동무에게 당원 예비교육을 실시키로 결정했소.

그 동안 염상진 동무의 추천을 받은 동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훌륭한 교육성과를 올려

열렬한 당원이 되었음은 물론

맡은 바 혁명과업을 용맹스럽게 수행중에 있소.

동무도 앞으로 실시될 사상무장 교육에 분투 노력하길 바라오.

먼저 당의 명령을 하달하겠소.

교육받는 사실을 완전 비밀에 부칠것이며,

노출을 피하기 위하여 그 어떤 하부조직에도 가담하지 말라는 것이오.

동무는, 특수임무를 위한 비밀당원이 되어야 하니까." 

 

허름한 민가의 썰렁한 방 안에 무릎 꿇은 채

정하섭은 식은땀을 흘렸다.

염상진은 역시 거물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고,

그 견디기 어려운 긴장 속에서 그를 부축하고 있는 것은 염상진 위원장이었다.

 

정하섭은 교육을 받으며

김범우 선생의 "자넨 아마 광적인 사회주의자는 못될 거야"하는 말을 깨부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열성을 보였다.

학교의 조직에는 이미 무슨 지령이 내려졌는지

그에게는 전혀 접근의 낌세도, 그렇다고 반대세력시하는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공부만 하는 조용한 학생으로 행동했다.

그러나 그는 교육 때마다 제출하는

'학원동향'이라는 보고서 쓸 건덕지를 찾아내기 위해서 은밀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정하섭은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서도

김범우 선생 만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그는 이제 자신이

김범우 선생의 생각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알았던 탓이었다.

그는 염상진하고만 내밀하게 접촉했다.

 

[염상진]  "자넨 역시 두뇌가 명석하네.

그 정도면 당 이론가하고도 상대 헐 수가 있겠구먼 그래."

 

염상진은 몇 개월 사이에

이론적으로 현격한 변화를 보인 정하섭을 대하고 아주 흐뭇해했다.

염상진의 그 흐뭇해하는 모습을 대하면서

정하섭은 묵은 죄의식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김범우 선생에 관한 이야기는 그날그날 빠짐없이 염상진에게 보고되었다.

통학을 하는 열성세포들의 민활한 활약상이었다.

그도 보고를 안 한 건 아니지만

다른 학생들처럼 시시콜콜이,

심하게는 자기 감정까지 섞는 식의 행위는 하지 않았다.

김범우 선생에게로 쏠리는 또 다른 마음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그때 염상진 위원장은 자신의 그런 동요를 눈치챘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염상진] "김범우 선생은 참 좋은 분이다.

마음이 바르고, 인정이 있고, 학식이 풍부 허다.

그런데, 생각허는 것이 환상적인 게 흠이지.

좋게 말해서 꿈속에 사는 이상주의자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정하섭은 인간 김범우와 염상진을 저울질해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울눈금은 언제나 수평이었다.

비슷하게 큰 키에 염상진의 인물도 기울지 않았다.

염상진도 마음씀이 컸고, 치밀하게 침착했고,

아는 것이 많으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었다.

그런데 표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분위기였다.

김범우가 사색적이고 지성적이라면 염상진은 야성적이고 행동적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개성일 뿐

저울눈금을 움직이게 하는 무게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정하섭이 마른 볏단에 불붙듯

사회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염상진에 의해서였다.

좀 더 순서를 잡아 말하자면,

염상진을 접하기 전에 벌써 당의정을 빨 듯

책방주인 문기수를 통해서 초벌구이는 되어있었다.

 

정하섭은 책방집 딸 정님이에게 정신이 팔려 뻔질나게 책방을 드나들었고,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책을 싸들고 나오고는 했다.

주인 문기수는 그 눈치를 어렵지 않게 챌 수가 있었다.

 

한다하는 부자집 아들이

자기 딸을 좋아하는 것이 문기수로서는 기분 괜찮은 일이었고,

족보로나 재력으로나 비교도 안되는 처지였지만

그물에 제 발로 든 고기를 놓치기는 아깝다는 욕심이 동했고,

목적을 달성하자면 있는 집 자식의 장난기일지도 모르니까

정신부터 뜯어 고치자 작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과 다른 친절을 보이고 관심을 쓰면서

서서히 사회주의의 분말을 딸년의 눈웃음에 버무려 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벅찬 단계에 이르자 사상적 연관을 맺고 있는 염상진에게 넘긴 것이다.

 

그 즈음 정하섭은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앞뒤를 분간하지 않는 아버지의 지나친 치부욕 때문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어느 곳이나 그랬듯

벌교 읍내도 일본인 재산을 서로 차지하려고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바로 그 선봉장이 된 것이다.

아버지는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인 하나뿐인 양조장을 눈독 들였고,

그것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참으로 놀랄만한 짓을 한 것이었다.

어차피 빈손 들고 쫓겨나야 할 일본주인을 상대로 아버지는 신속한 흥정을 한 것이다.

 

어수선하게 며칠이 지나는 동안

양조장의 소유권은 은밀하고도 합법적으로 아버지에게 넘겨졌고,

일본인들이 떼지어 중도방죽을 지나 선수머리 선창에서 떠난 다음에야 그 사실은 밝혀졌다.

 

아버지는 우습지도 않게도 선창까지 배웅을 나가는 어리석음을 범했는데,

나중의 소문에 의하면 그건 배웅이 아니라

양조장 소유권을 넘겨받으며 일본주인에게 준 금덩이를

무사히 가져갈 수 있도록 호위를 해준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은밀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했는지 모르지만

한 번 부풀기 시작한 소문의 힘은 막을 길이 없었다.

읍내의 입 달린 사람이면 하나같이 아버지를 비난하고 욕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뻔뻔스러울 만큼 당당한 태도로 양조장 사장 행세를 했다.

 

정하섭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학교를 가는 것마저 싫어졌다.

아버지의 더러운 치부욕에 환멸을 느꼈고, 그 뻔뻔스러운 태도가 증오스러웠다.

 

아버지는 아무런 노력 없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 재산만으로도 읍내에서 꼽히는 부자 축에 들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정하섭은

가난에 허덕이는 친구들을 대할 때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그런 세습적 혜택에 대해

미안함 같은, 죄스러움 같은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가난하면서 머리 좋고 자존심 강한 아이들 앞에서는 그 정도는 한층 심해졌다. 

 

족보와 더불어 세습되는 혜택 속에서

평생을 편안하게 사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그 불합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정하섭의 의식 속에는

가난하면서도 똑똑하고, 영리하고, 당당하고, 건실한 아이들이

자신을 향해 조소와 경멸과 적대감의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의 분별없는 치부 욕은 파렴치한 친일로 몰리게 되었다.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그 즈음에 책방에 들러 칸나처럼 화사한 정님이의 얼굴을 보고,

읽을만한 책을 사오고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피신법 이었다.

 

염상진에게 넘겨진 정하섭은

겨울 3개월 동안 사회주의 늪 속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정하섭의 의식은 배고픈 자의 식욕이었다.

 

1년에 걸친 교육을 끝낸 정하섭에게 두 차례에 걸친 테러지령이 내려졌다.

그것이 당성까지를 테스트하려는

이중목적의 지령이라는 것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주저없이 그 일을 감행했다.

 

그 성공과 함께 그는 당원이 될 수 있었다.

당원이 된 날 그는 밤길을 혼자 걸으며, 김선생님 저를 좀 보십시오, 속말을 하고는

허하게 웃었다.

그 때 염상진은 공산당 활동 불법화로 체포되어 징역을 살고 있었다.

 

[공산당원]  "정 동무, 마침내 때가 왔소.

동무는 순천 지구로 내려가 혁명의 주체로 암약하라는 당의명령이오.

장도를 축하하오."

 

당의 명령 앞에 학업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날로 순천을 향해서 야간열차를 탄 것이다.   

기차는 순천역까지 갈 수가 없었다.

순천에서 밀려난 경찰들에 의해서 외곽지역이 봉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조처가 그의 발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교통통제를 엄중히 한다고 해도 산길은 얼마든지 비어 있었던 것이다.

 

적의 반격은 의외로 신속했다. 

23일 아침부터 중심가를 향해 무차별 비행기 폭격을 감행하는 것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지상군에 앞서 비행기 폭격이 감행되고 있는 것은 미군의 본격적인 출동을 의미했다.

무고한 읍민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읍내 전투를 피해 병력을 외곽으로 분산시키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병력 분산은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적들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순천 읍내로 진입했다.

 

이틀 동안 적을 외곽으로 유인해내기 위한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여수 쪽의 상황변화에 대처하고 있었다.

여수 앞바다에는 미군 함정이 떠서,

읍내 중심가를 향해 또한 무차별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여수에서도 같은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26일 밤을 기하여 모든 병력을 순천 외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백운산을 거점으로 하는 부대 편성과 이동이 구체화되었다.

그것은 투쟁의 장기화를 위한 작전수립이었다.

따라서 투쟁지역을 지리산과 그 주변으로 확대시켜

기존 지방조직들과 공동투쟁을 전개한다는 목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1권  5장    조계산 숯막 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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