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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제6장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by 나무 심고 책읽는...... 꿈은계속된다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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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권 6장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조정래 대하소설

김범우 김사용 김범준 문서방, 벌교 낙안, 낙안고을 낙안벌, 목포 나주평야 보성군 화순군, 순천만, 고흥반도 순천 보성, 소리꾼, 평양 황해룡, 독립자금 김경철 김범우 처, 신석주 귀국선, 가거라 삼팔선 탱자나무 전설,

 

제1권 6장(1)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https://youtu.be/18Itf7kvC5Q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제 1 부 한의 모닥불     

 

제6장.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김범우는 아침햇살이 반나마 차오른

지게문의 때묻고 낡은 창호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은 창호지의 누추를 어느 한 부분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누르께하게 번진 얼룩이나

아무렇게나 찢어 붙인 땜질자리나

하나도 누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햇살은 그런 자리마저 가리지 않고 고루 퍼지는 까닭인가.

지게문 위로 드리워져

은밀한 걸음걸이로 밀려올라가고 있는 그림자는

처마의 것이었다.

그림자 끝은 볏짚의 삐죽삐죽한 모습을

그대로 창호지 위에 그려내고 있었다.

그 그림자마저

초가지붕의 솜옷 같은 두툼한 질감을 지니고 있는 듯싶었다.

 

갑자기 그 그림자의 처마 끝에 요동치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짹짹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참새 두 마리가 뒤엉켜 날개를 푸드득거리고 있었다.

 

김범우는 문득

그걸 싸움이라 여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서로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이내 참새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허공을 치며 푸득거리던

두 마리 작은 새의 생기 넘치던 날개짓이 잔영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 그것들은 싸운게 아니라 분명 사랑을 한 것일 게다.

김범우는 되씹어 생각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싸움 - 김범우는 깊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느리게 뿜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또 염상진이 생각났다.

김범우는 그의 생각을 떼쳐내려고 했다.

6일째 꼼짝없이 갇혀 지내는 동안 신물이 나도록 그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끝까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투철한 의식의 사회주의자가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토록 성급한 공산주의자로 변할 줄은 몰랐었다.

 

그의 지성은 어디로 증발했기에 인민재판을 주도할 수 있었으며,

공개처형을 감행할수 있었을까.

죄 지은 자의 죽음은 마땅하다 하더라도

그 즉흥적인 방법과 감정적 행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전개하고 있는 싸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말할지 모른다.

그런 공개처형은 인민의 선동과 동원을 위해서 혁명과정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방법은 이미 혁명을 성취시킨 나라에서 사용한 것이라고.

 

김범우는 염상진을 밀어내고 아버지를 생각하려고 했다.

문 서방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인민재판을 치르고 난 다음부터 몸져 누운 모양이었다.

 

[문서방] "의사 선상님도 댕겨가시고 혔는디요,

벨 병은 아니라는디 어르신은 시름시름 앓으시는 구만이라."

 

문 서방의 설명이 없었어도

아버지의 병은 병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무사했다고는 하지만

인민재판을 받은 아버지의 심적 타격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이 어렵지 않았다.

 

[문서방]  "서방님, 서방님."

  문 서방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김범우]  "왜 그래요, 문 서방?"

  김범우는 가슴이 철렁하는 걸 느끼며 지게문을 떼밀다시피 했다.

 

[문서방]  "워메 서방님, 얼렁 채비허시씨요, 채비혀요."

 

문 서방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얼굴은 밝게 웃고 있었다. 

김범우는 읍내의 사정에 변화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김범우]  "무슨 일이요?"

 

[문서방]  "금메 좌익 덜이 다 도망가 뿔고

읍내에는 순사들이  총 미고 댕긴당께요." 

 

김범우는 돌아 앉으며 새 담배를 꺼냈다.

결코 반가움일 수 없는 감정을 밀어내며 우울이 가슴을 채워왔다.

 

또 시작된 싸움 - - -그건 암담한 우울이었다. 

염상진과 그의 부하들은 어디로 피했을 것이며,

군이나 경찰은 그들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념의 현수막을 내건 정치적 전쟁은

바야흐로 그 수레바퀴를 본격적으로 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어느 쪽에서나 민족은 내세워졌으나

정작 수레바퀴 아래 깔려야 하는 건 민족이었다.

 

[문서방]  "서방님, 싸게 채비허시랑께요."

 

 [김범우] "그럽시다, 가긴 가야지요."

  김범우는 한숨에 섞어 말하며 미적미적 문지방에 다리를 걸쳤다.

 

[김범우] "문 서방, 그 동안 폐가 많았어요, 그만  들어가시오." 

 

김범우는 대나무로 엮은 사립문을 나서며 말했다.

 

[문서방]  "워디요, 댁에 꺼정 모시고 가야제라.

어르신께서 당부허신 말씸 이신디요." 

 

 문 서방은 가당찮다는 듯 앞서 걷기 시작했다.

김범우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당부가 있었다면 그건 문 서방이 지켜야 할 책무였던 것이다.

자식의 나이를 감안하지 않고

그런 당부를 한 아버지의 마음이 추운 바람으로 가슴을 적셔왔다.

 

아버지의 고적을 알 듯도 싶었다.

전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내심으로 큰아들을 체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해방이 되고 벌써 3 년이 넘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귀향을 위해 소모하는 시간으로는 너무나 긴 세월이었다.

 

형이 집을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새벽마다 첫 샘물을 장독대에 올리고

무릎 꿇는 어머니의 합장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새벽 지성을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심신의 곤욕을 치르고 물질적 손해를 보면서도

그런 큰아들을 둔 것을 무언중에 긍지로 삼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 긍지는 촌스러운 과시욕이 결코 아니었다.

벌교와 낙안에 걸쳐

뼈대나 재산을 자랑할 수 있는 집안들은 꽤나 있었지만

그 자식들이 독립운동에 몸바치고 있는 경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경사났다고 벌이는 잔치는

법관시험에 합격했다거나 은행원이 되었다거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더구나 벌교라는 지역에 작용하고 있는

행정적 특수성에 비추어보면

범준 형님 같은 존재는 경이적인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 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가 나주평야의 쌀을 실어내는 데 

최적의 위치에 있는 항구였다면, 

벌교는 보성군과 화순군을 포함한 내륙과 직결되는 포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반도와

순천,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철교 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시글거렸고,

상주하는 일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훨씬 많았다.

그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 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

벌교에도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어제부턴가 '벌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 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멋 자랑 하지말라'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돈을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한들

그들이 만지는 돈은 푼돈에 불과했고,

주된 경제권은 몇몇 일인들과 소문난 지주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지주들은 땅이 제공하고 있는 치부에만 만족하지 않고

일인들과 줄이 닿는

안전한 사업에 투자하고 있는 사업가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족보와 지체를 내세우면서도

돈계산이나 잇속에 더 빨라

그나마 양반의 덕목이라 할 수 있는

품격이나 인품 같은 것은 거의 손상해버리고 있는,

잘못 개명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읍내 사람들도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다해도 다른 데 농민들과는 달리 귀와 눈이 밝았고,

따라서 입이 야무졌다.

돈의 마력 탓이었는지

읍내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인들과 그런대로 잘 어울려 살았다.

그런데 벌교의 그런 분위기에

김범준이 긴장의 찬물을 끼얹은 것은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자 1년이 가까워서였다.

학생 지하운동에 가담했다가 발각이 나서

일본을  탈출했다는 것이 벌교에 퍼진 첫 번째 소문이었다.

선창에 들고 나는 배를 노리는 도둑이나 지키고, 

차부나 역전에서 일어나는 주먹패의 싸움이나 막던 순사들은

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서에서는 김사용의 집 근처에 잠복조를 배치하고 순시를 강화시켰다.

제 놈이 뛰어야 벼룩이지 하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김범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서 체포되었다는 소식도 없었다.

지친 경찰에서는 잠복조를 철수시켰다.

석 달이 지나 김사용에게 소식이 왔다.

다 낡아빠진 북 하나를 허리에 매단

남루한 차림의 떠돌이 소리꾼이 어느 날 소리 걸식을 청했던 것이다.

 

[소리꾼] "지 멋대로 질르는 소리오나

퇴허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어르신께서 일찍부텀 소리럴 좋아허신다는 소문 듣고

요리 찾아왔으니,

못허는 소리 들으시고 한술 밥 내리시면 되겄구만요."

 

30중반의 사내는 김사용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김사용은 그 예사롭지않은 눈이

무슨 사연을 담고 잇음을 직감했다.

그 눈빛이 아니었어도 한끼 밥을 청하는 소리꾼을  퇴할 김사용이 아니었다.

 

[김사용] "예로부터 소리걸식을 청하는 사람치고

명창 아닌 사람이 없는 법인디, 워디 한번 들어봅시다."

 

사내는 대청마루에 정좌하더니 소리를 뽑기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의 소리 속에

 

[소리꾼] '범준이 춘부장님 소식 받으시오'

하는 말이 섞이고 있었다.

사내가 옷섶에서 꺼낸 종이쪽에는

'아버님 소자는 무사하옵니다' 하는 글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틀림없는 아들의 필적이엇다.

구례에서 왔다는 그 사내는 아들 범준이를 모른다고 했다.

자신과 접선되는 사람한테서 그 쪽지를 받았을 뿐이고,

만주의 독립군에 가담되어 있다는 사실은

구두로 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언제 오게될지 모르지만 독립 자금을 준비해놓으라고 했다.

사내는 몇 끼를 굶은 것처럼

억척스럽게 밥을 먹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김사용이 노자를 내밀자,

 

[소리꾼] "어르신, 그런 것이 다녀간 근거가 됩니다."

사내는 스치듯이 낮고도 빠르게 말했다.
김사용은 반사적으로 돈을 조끼주머니에다 쑤셔넣었다.

 

[소리꾼] "함펴엉처언지이 느을근 모오미..."

 

 이름도 밝히지 않은 사내는

천연덕스럽게 소리를 뽑아대며 멀어져가고 있었다.

 

김범준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읍내를 왁자하게 만든 것은 그로부터 반 년쯤 지나서였다.

그보다 2개월 앞서

김범준은 평양이 고향인 황해룡과 함께 집에 나타나서

독립자금을 가지고 갔었다.

읍내에 퍼진 소문은 헌병대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한 것이었다.

 

[벌교주민] "우리 읍에서도 기엉코 인물 나부렀구만 그랴."

"금메 말이시, 제석산 뿌랑구가 있긴 있는디 

고런  인물 하나 못 나올라등가." 

"참말로 벌교 사람덜 면체면은 헌 것이구마."

 

사람들의 수군거림이었다.

 

어느 때 김범우의 기억 속에서는

형 범준의 모습이 어슴푸레하게 흐려지고는 했다.

형과는 열 살 터울이었고 그 사이에 누나가 셋이 있었다.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벌써

형은 아버지만큼 큰 남자라는 인식이 범우에게는 박히게 되었다.

형이라고 해도 살가운 정을 느끼기 보다는

믿음직스러우면서도 어려웠다.

형과 헤어진 것이 아홉 살 때였으니까

 어느덧 이십 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동안 형은 세 차렌가 다녀갔지만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염상진도 보았던 사진을 통해서

독립군인 형의 모습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형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사진의 모습만 분명해질 뿐 그전의 얼굴은 뿌옇게 흐렸다.

 김범우는 아버지가 일흔셋, 어머니가 일흔다섯임을 새삼스럽게 상기했다.

 

[문서방]  "서방님, 한 가지 여쭐 말씸이 있는디요."

 

앞서 가던 문 서방이 무료했던지 뒤돌아서며 말을 꺼냈다. 

김범우는 무슨 말인지를 눈으로 물었다.

[문서방] "긍께 말이요,

염상진인가    위원장 동무란가 허는 사람이 말허기를,

지주덜 전답을 싹 다 뺏어갖고

소작인덜 헌테 골고로 골고로  갈라준다고 혔다는디,

고것이  참말이었을 께라?"

 

김범우는 엷게 웃었다.

 염상진이 사람들 앞에서 가장 자신만만하게 외쳤을 말이었다.

 

[김범우]  "문 서방 생각으론 참말 같소?"

 

[문서방]  "금메 말이요,

고렇게 됨사 싫을 작인 하나도 읎을 것이지만,

시상에 고런 기맥힌 인심이 워디 있을라디야

허는 생각이 듬스로,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읎이

요상시럽 구만이라."

 

김범우가 대답을 하지 않고 되물었던 것은

문 서방이 말을 하는 동안 마땅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지주의 땅이 몰수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분배된 땅이 결코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는 점을 납득시키기가 난감했다.

 

그걸 납득시키자면

사회주의 경제체제 전반에 걸친 장광설을 늘어놓아야 할 것이고,

그런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문 서방은 너무나 무지했다.

그렇다고  염상진의 말을

전적으로 거짓말이라고 일축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더구나 모호하게 대답을 얼버무릴 수도 없었다.

그건 문 서방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일 것이었다.

 

[김범우]  "문 서방,

문 서방은 문 서방  이름으로 된 땅을 갖고 싶지요?"

 

[문서방] "하먼이라, 

살아 생전에 안되먼 저승에 가서라도 풀고 잡은 소원인디요."

 

[김범우] "그럴 테지요.

만약 그 소원이 풀려 열 마지기쯤 논이 생겨 농사를 지었는데

그 쌀을 몽 땅 빼앗긴다면 어떻게 되겠소?"

 

[문서방]  "워메 워메,

그럴라먼 염병헌다고 농새를 지어라?"

 

  문 서방은 눈까지 부릅뜨며 소리쳤다.

 

[김범우] "그렇지요,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지요

그럼, 쌀을 그냥 빼앗긴 것이 아니라

다 나라에 내 놓고 매달 배급을 타다 먹으면 어떻겠소?"

 

[문서방]  "미쳤간디요?

지가 진 농새 죽이 끓든 밥이 끓든

지 손으로 간수허는 맛에 살제

무신 초 친 맛이라고 배급을 타다 묵어

 동냥아치도 아니겄고,

 

고런 농새도 안 지어라." 

 

[김범우]"그런 농사도 안 짓겠다면,

그럼 이런 것은 어떻겄소? 

그 누구의 명의도 아닌 수백 마지기 논에
공동으로 동네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정해진 양을 배급 타먹는 것 말이요."

 

[문서방]"허어, 갈수록 태산이시 웨.

아, 니 것도 내 것도 아닌 논에

그 눔에 농새 자알 되야 묵겄소.

쎄빠지게 일헐 눔 하나또 읎을 것잉께

가실허고 나먼 쭉징이만 수북헐 농새 지나마나  아니겄소?"

 

[김범우]  "문 서방,

염상진이가 논을 분배한다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오."

 

[문서방] "머시 워째라?

명의도 읎는 땅에 다 항꾼에 농새짓고

배급 타묵는다는 것 말인 게라?"

 

[김범우]  "그래요."

 

[문서방]  "워메 시장시럽고 깝깝한 거.

고것도 말이라고 헌당가?

그려서 다 항꾼에 잘 살게 된다고 떠들어 쌓는갑구만.

근디 고건 공염불이여. 

시상 사는 이치를 몰라서 허는 소리제,

내 텃밭 배추가

쥔 밭 배추보다 속살이 더 여물게 차는 이치가 먼지도 몰르고."

 

여기까지

 

문 서방은 찔끔해져서 얼른 입을 다물고 김범우를 쳐다보았다.

김범우는 못 들은 체 앞만 보고 걸었다.

 

[문서방]  "긍께 믿을 눔 하나또 읎는 시상이여.

좇 뽄다고 지주 논 뺏어서 공짜로 주겄어. 

다 즈그 덜 이롭게 해처묵는 짓거리제."

 

문 서방은 뒤쳐져 오며 맥빠진 소리로 혼잣말을 내뱉고 잇었다.

김범우는 당황스러웠다.

설명을 한다는 것이 그만

염상진네를 모략하거나 매도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반응은 분명 자신의 본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소작인들의 무조건적인 땅 소유 욕망 앞에서는

그런 거부나 불신을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설명으로는 너무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김범우는 그 정도에서 끝내기로 했다.

문 서방의 태도로 보아 염상진의 말에 솔깃했던 것이 분명했고,

그런 기대를 단념시킨 것만으로도 효과를 거둔 셈이었다.

 

[김범우]  "문 서방, 조금만 기다려봐요.

농지개혁이 실시되면

문 서방도 문 서방 이름이 적힌 땅을 갖게 될 테니까요."

 

김범우는 풀이 죽은 문 서방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문서방]  "니기럴,

고걸 믿는 작인은 이 시상에 하나또 웂어라." 

 

문 서방은 벌컥 화를 내듯이 언성을 높였다.

김범우는 순간적으로 언짢았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김범우]  "믿는 작인이 하나도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문서방]  "차암 서방님도, 유식헌 양반이 그걸 몰라서 물으신당가요?" 

 

문 서방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픽 바람이 새는 헛웃음을 쳤다.

김범우는 그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잇는 문제였다.

 

[김범우]  "짐작은 하고 있소.

그런데 작인들이 그리도 안 믿는단 말이오?"

 

[문서방] "지주양반덜이 양심적으로 혀야 믿제라.

농지개혁헌다는 말이 나돔스롱부텀

지주덜이 뒷 구녕으로 

살금살금 무신 짓거리 덜 허는지 서방님도 아시제라?"

 

 김범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농지개혁에 대비해서 지주들은 자기네 농토를

가난한 친척들 앞으로 명의변경을 해서 은폐시키거나 

타인에게 매도하거나 하는 일들을 벌이고 잇었다.

 

그건 우선적으로 분양 양도권을 가진 작인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었다.

지주의 법적 토지가 줄어드는 만큼

작인들은 분배를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문서방] "참말로 순사가 들었다 허먼

몽딩이 찜질 당헐 소리제만 서방님 앞이니께 허는디,

사람덜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오?

나라에서는 농지개혁 헌다고

말 대포만 펑펑 쏴질렀지

차일피일 밀치기만 허지,

지주는 지주대로 고런 짓거리 허지,

가난하고 무식헌 것덜이 믿고 의지헐디 웂는 판에

빨갱이 시상되먼 지주 다 쳐웂애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  헐 사람이 워디 있겄는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문 서방을 어찌 무식하다 할 것인가.

김범우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충청도보다는 전라도가,

전라북도보다는 전라남도가

더 좌경세력이 강하다는 것과 문 서방의 말과는 상통하고 있었다.

 

 [김범우] "문 서방, 문 서방의 지주는 누구요?"

 

김범우는 문 서방을 쳐다보지 않고 걸으며 물었다.

 

[문서방]  "무, 무신 말씸이다요?"

 

문 서방의 목소리는 완연히 당황해 있었다.

 

[김범우]  "김사용이 맞지요?"

 

[문서방]  "그, 그런디요..."

 

[김범우]  "그분도 뒤로 그런 짓 합디까?"

 

[문서방]  "워디요, 워디요. 어르신이 어디 그럴 분 이시간디요."

 

[김범우] "틀림없이 믿어요?"

 

[문서방]  "하먼이라.

그렁께 지는 빨갱이 될 생각 꿈에도 안 혔제라."

 

[김범우]  "됐어요.

농지개혁이 되면 틀림없이 문 서방 앞으로 땅을 드리도록 내가 약속하겠소."

 

[문서방] "아니, 서방님..."

 문서방은 걸음을 멈추었다.

한 순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분명 꿈은 아니었다.

문 서방은 걸음을 빨리 했다.

그리고 김범우 앞을 막아서듯 했다.

 

[문서방] "서방님 고맙구만이라, 고맙구만이라."

문 서방은 두 번, 세 번 허리를 꾸벅거렸다.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춰선 김범우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김범우]"문 서방, 그러지 말아요.

그건 문 서방이 오래도록 고생해서 얻은 당연한 권리인 거요."

 

[문서방]"아니어라우, 아니어라우."

 

  문 서방은 기어이 목멘 소리를 냈다.

 

[김범우]  "어서 갑시다. 아버님이 기다리시는데."

 

  김범우는 빨리 걷기 시작했다.

 

집의 위치가 읍내를 통과하지 않아도 되는 지점에 있음을 

김범우는 다행으로 여겼다.

염상진의 손에 5일 동안 장악되었던   읍내의 모습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김범우]  "문 서방..."

김범우는 대문을 들어서기 전에 문 서방을 불렀다.

 

[문서방]  "야, 서방님."

뒤따르고 있던 문 서방이 빠른 동작으로 김범우 옆으로 다가섰다.

 

[김범우]  "문 서방도 눈치로 다 알고 있겠지만 뒤숭숭한 세상이 됐소.

각 별이 말조심하도록 하시오.   

한 치 혀가 역적 만든다는 옛말이 있는데,

마음에 있는 생각이라고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시오. 무슨 말인지 알겠지오?"

 

[문서방]  "하먼이라. 명심허겄 구만요."

 

문 서방은 김범우의 말뜻을 십분 헤아리며

방아깨비처럼 연거푸 허리를 꾸벅거렸다.

 

아버지의 신색은 많이 상해 있었다.

 

[김범우]  "아버님, 문 서방 편에 소식은 듣고 있었습니다.

좀 어떠신지요."

 

[김사용] "내사  괜찮허다.

니는 무사허냐?"

 

김범우는 아버지의 음성마저

탄력을 잃고 습하게 변해 있음을 느꼈다.

 [김사용 모친]  "금메, 상진이 그눔이 글씨..."  

 

[김사용]  "어허!"

아버지의 목청이 높아졌고,

어머니는 마땅찮은 표정인 채로 말을 중단했다.

 

[김사용] "고생 많이 했지야?"

 

[김범우]  "제가 무슨...

아버님이 못할 일 치르셨지요."

 

[김사용]  "다 시국 어저러운 탓이다. 안직 읍내는 못 보았을 테지?"

 

[김범우] "네, 당분간 보고 싶지가 않습니다."

 

[김사용]  "그려..."

 

[김범우]  "그만 누시지요."

 

[김사용]  "눠야지. 워쨌거나 앞으로가 또 큰 문제다."

 

  김사용의 근심 짙은 목소리가 잠겼다.

 

[김범우]  "마음 상하신 것 이기시고 어서 쾌차하셔야죠."

 

[김사용]  "그래야지."

 

김사용은 솟아오른 한 뭉텅이의 한숨을 어금니로 깨물었다.

그 한숨은 파장이 불규칙한 콧김으로 변해 흘러나왔다.

 

김범우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더 지켜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김사용]  "가그라. 건너가 쉬어."

 

김범우는 말없이 일어나 아버지의 방을 나왔다.

한숨을 애써 참아내는,

낡은 창호지 같은 아버지 모습이

그렇게 비애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건 한 자연인의 늙은 모습이 주는

소박하고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봉건의식의 시대가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그 마지막 잔영이었다.

 

서른 언저리의 나이에

충의 대상인 왕조의 몰락을 겪은 아버지는

전형적인 이조인 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40년의 생애는 정지된 삶일 뿐이었다.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게 된 유교적 학문과

자랑삼을 의미를 상실한

양반의 족보를 함께 싸서 벽장 속 깊숙이 넣어야 했다.

 

아버지의 무미한 생활을 그나마 지탱시켜주었던 것은

낙안에 있는 향교를 찾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일이었을까.

몇몇이 모여 앉아 아무리 개탄하고 통분해 한들

이미 무너진 왕조가 다시 일어날리 없는 일이었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학문을 논하고 

운율 맞춰가며 한시를 짓는다고 한들

이미 끊어진 맥이 다시 이어질 리 없었다.

 

그건 서글픈 회고 취미였을 뿐이고,

여름 한낮 사방의 격자문을 모두

처마끝으로 걷어올린 대청마루에서

그들이 목청 가다듬어 읊어대는 시조가락 소리는

낙안 들녘 소작인들의 증오심만 더욱 끓어오르게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향교에 발길을 끊다시피 한 것은

범준 형님 사건이 발생한 다음부터였다.

 

[김사용] "찬을 3가지 이상 올리지 말 것이며,

 명절이라 하더라고 떡을 두 가지 이상 해서는 안 된 다."

 

엄명이 내려졌다.

집안에 갑자기 궁핍이 몰려든 것 같았지만

누구 하나 불평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서슬이 전에 없이 매섭기도 해서였지만

그런 조처가 왜 취해진 것인지를

집안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김범우 모친] "범준이 성님이 집 떠나 고생 하는디

우리만 잘 묵고 살아서는 안된께 이러는 것이다."

 

갑자기 가난해진 밥상머리에  앉아

어머니는 조심스런 목소리로 굳이 설명을 하려 들었다.

 

[김범우] "엄니, 그 말 순사가 들으면 큰 일난께 고만 혀.

엄니가 말 안혀도 나 다 알고 있응께로."

 

범우는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고,

 

[김범우 모친] "워쩌?"

어머니는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김범우 모친] "워메, 신통방통한 내 새끼,

어린것이 워찌 그리 속이 짚을끄나 와."

어머니는 범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범우는 어머니의 포옹이 어느 때 없이 뜨러운 걸 느끼면서도,

 

[김범우] "나가 애기간디?" 하며 어머니의 가슴을 밀어냈다.

 

[김범우 모친] "그려, 니는 열 살 묵은 어른이다."

 

 어머니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그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괴어있었다.

그런 생활의 내핍이

형의 고생을 함께 아파하는 가족으로서의 유대감만이 아니라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한 방법으로

이중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범우가 깨달은 것은 2~3년이 더 지나서였다.

 

아버지는 예사롭지 않은 슬기를 발휘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형으로부터 비롯되는 시련과 고통에

의연하게 맞서고 꿋꿋하게 이겨나갔다.

 

아버지는 회고취미에 빠져 있는 족보뿐인 양반의 후예도 아니었고,

선대가 물려준 농토나 타고 앉아

소작인들의 등껍질이나 벗기려는 포악한 지주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큰아들과 함께

나라 잃어버린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건 경이롭게까지 느껴지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형은

조선인으로서 정지된 삶을 살고 있었던 아버지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적극적 삶의 방법이

아버지의 의식세계 전체를 형성하고 있을

조선적 가치관이나 윤리관까지를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아버지의 변모는

염상진을 흉허물없이 대하고,

해방을 맞은 새 세상에는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정도일 것이었다.

 

그런데 염상진은 어버지를 끌어다가 인민재판의 단상에 세웠다.

염상진은 아버지의 목숨을 부지시키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정신은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염상진에게

결코 고마워할 것 같지가 않았다.

김범우는 아버지의 여생이 그다지 길지 못하리라는 예감을 가졌다.

그는, 그 예감을 떼쳐내려고도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반가움에 겨워 매달리는

아들 경철이를 안고 아랫목에 막 앉으려는 참이었다.

 

[김범우 처]  "경철아, 니 할무니 방에 가서 놀아라."

아내가 꾸짖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김경철, 김범우 아들] "아녀, 나 아부지허고 놀란디."

하며 아들이 가슴으로 바싹 파고들었고,

김범우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김범우 처]  "아, 싸게 엄니 말 들어. 안 그러먼 매맞을 팅께."

 

아내는 한층 거친 음성이었다.

평소의 아내답지가 않았다.

아내의 초조한 기색이 드러난 얼굴이 아니었어도

김범우는 아이를 피해야 할 무슨 일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김범우]  "그래, 우리 경철이 할무니한테 가서 놀아라.

이따가 아부지가 말 태워줄 테니까.

우리 경철이 착하지?    그렇지?"

 

[김경철, 김범우 자]  "치이, 둘이서만 재미있게 놀란 것이제?

 나 아부지가 을매나 보고 잡았다고.     나 안간당 께."

 

아들은 몸까지 훼훼 돌리며 거부의 뜻을 나타냈다.

그 동안의 이별이 어린것의 마음에는 그 나름의 그리움을 키웠을 것이고,

만난 반가움을 미처 풀 겨를도 없이

떼어놓으려 하는 것이 무리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말뜻을 헤아릴 나이도 아니었다.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잘못이 없는 아이를 꾸짖어 내쫓을 수 없을 바에는

신효한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었다.

 

[김범우]  "잔돈 가진 것 있소?"

  김범우는 아내를 향해 엷게 웃으며 물었다.

 

 [김범우 처] "돈을 주실라고라?"

 

[김범우]  "당신이 급한 모양인데 그 방법밖에 더 있겠소?"

 

아내도 아버지 옆에 있고 싶어하는 어린것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돌릴 방법은 강압적인 것이 아님을 알았는지

벽 쪽으로 돌아서서 치마를 걷어올렸다.

치마 속에 매달고 있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려는 것이었다.

 

[김범우]  "경철아, 이 돈 가지고 가서 사탕 사먹어라."

 

[김경철, 범우 자]  "와아, 우리 아부지 질(제일)이다!"

  경철이는 언제 아버지 옆에 있고 싶어했냐 싶게 소리치며 방을 뛰쳐 나갔다.

 

[김범우]  "무슨 일이오?"

김범우는 별로 좋지 않은 예감으로 물었다.

 

[김범우 처]  "저어...오빠가 순천 경찰서에 붙들려 들어갔다는 디요."

 

[김범우]  "아니, 처남이 왜?"

 

김범우의 목소리는 느닷없이 컸다.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소리는,   처남이 왜? 였지만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뇌리를 친 것은,

아니 그 사람도 좌익이었단 말인가! 하는 충격이었다.

 

[김범우 처]  "좌익활동에 뒷돈을 댔다고 허는디, 참말로 믿을 수가 없구만이라."

 

 아내는  옷고름 끝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김범우]  "그것 참...또 더 아는 게 있으면 다  말을 해보시오." 

 

김범우는 느리게 담배를 빼들었다.

아내가 그렇듯 그로서도 처남의 좌익활동이란 믿어지지가 않았다.

 

[김벙우 처]  "긍께...뒷돈 댄 일이 발각나서 잽혀갖고

농업학교 운동장까지 끌려갔는디,

 하늘이 도왔는지

거그서 잘 아는 사람을 만내

포도시 총살을 면허고 경찰서에 갇혔당마요.

고것이 어지께 아칙 일인디,

앞일이 워쩌크롬 될랑가 알 수가 웂응게,

얼렁 손 잠 쓰라고 친정서 사람을 보냇드만요."

 

김범우는 깊게 들이켠 담배연기를 한숨으로 토해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처남은 좌익 지하조직의 자금책이었던 모양이다.

처남 신석주와 좌익과...전혀 맥이 닿지 않았다.

항시 웃음이 감돌고 있는 눈언저리와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잔잔한 성품의 그는

천생 타고난 은행원이었다.

 

그는 순천 금융조합에서 나이에 비해 빠른 승진을 하고 있는 편이었고,

그 자신도 은행원이라는 직업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성품의 사람이 대부분 그렇듯

그는 가정적이었고 소시민적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정치, 사회적 격변에도

그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미 군정이 실시되자

그가 민첩하게 보인 반응은 '제니스' 축음기를

안방에다 모셔다놓은 것이었다.

그는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 소리내는 기계에 불과한 물건을 애지중지하며

 '귀국선'이니 '가거라 삼팔선'이니 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흡족해했다.

터무니없는 정치의식에 들떠 날뛰는 것보다야

그런 소시민 의식이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김범우는 처남 신석주와 자주 마주앉을 수는 없었다.

 

[김범우 처]  "워째야 쓸께라?"

 

아내가 행동을 독촉하고 있었다.

 

[김범우]  "너무 걱정 마시오.

내 곧 순천으로 넘어가 볼 것이니." 

 

김범우는 방바닥에 초점없는 눈길을 던진 채 대꾸하며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는 그가 비밀리에 자금책 노릇을 한 경우이고,

둘째는 어느 누군가에게 돌려준 돈이

자신도 모르게 좌익 자금으로 사용된 경우였다. 

 

김범우는, 사람이란 그 속을 알 도리가 없는

무서운 짐승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속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처남의 경우는 후자쪽 이리라고 생각이 기울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을 듯싶었다.

 

  김범우는 아내가 가져온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김범우 처] "무담시 당신이 고상허시게 생겼구만요."

대문까지 따라나온 아내가

주눅든 것 같은 소리로 말했다.

 

[김범우]  "고생은 무슨 고생이오.

학교에도 나갈 볼 겸 마침 잘됐소."

 

 말은 그렇게하고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지만

기분은  찌부드드하게 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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