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6장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1권 6장 태백산맥 조정래 대하소설
김범우 김사용 김범준 문서방, 벌교 낙안, 낙안고을 낙안벌, 목포 나주평야 보성군 화순군, 순천만, 고흥반도 순천 보성, 소리꾼, 평양 황해룡, 독립자금 김경철 김범우 처, 신석주 귀국선, 가거라 삼팔선 탱자나무 전설,
제1권 6장(2)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제 1 부 한의 모닥불
제6장.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1권 6장(2)로 이어집니다
김범우는 학병에서 돌아왔을 때처럼
며칠이고 문 밖 출입을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염상진이
5일 동안에 걸쳐 한 행위를 보지 않았듯이
군경이 앞으로 할 행위도
보지 않으려고 했었다.
염상진의 행위를 제지할 수 있는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듯이
군경의 행위에도
아무런 영향력을 나타내지 못할 것은 마찬가지였다.
무책임한 목격자,
무능력한 구경꾼이 되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김범우는 언제부턴가
학교에도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지난 4월19일
김구가 김규식과 함께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있는 열성을 다 바쳤었다.
제발 서로가 정치적 욕심을 앞세우지도 말고,
강대국이 내세우는 이념에 얹혀
춤추는 꼭두각시 노릇도 하지 말고,
나라 잃어버리고 산
40년의 굴욕과 슬픔을 먼저 생각하며
민족이 똘똘 뭉쳐 살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을 상대로 싸운 연합국의 입장이고,
그들의 승리로 해방을 얻은 땅의 사람들이
밀가루 반죽처럼 하나로 굳게 뭉쳐
새 내라 건설을 주장했을 때,
설령 그들이
한반도땅을 놓고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 한들
끝내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것은 환상도 망상도 아니었고
두 강대국이
제멋대로 줄그어 양분시켜놓고 있는
한반도의 주인인
동포 모두가 직시해야 할 현실이었다.
김범우가
민족의 발견과 그 단결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을 굳힌 것은
식민지시대를 살아내서만이 아니었다.
그 결정적 계기는 OSS동지에서
하룻밤 사이에 포로취급을 당하면서였다.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수용소를 거쳐
하와이 수용소에서 4개월을 보내면서
그 생각은 굳어졌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약소민족들의 자존이나 독립을
철저하게 우롱하고 기만하며
강대국들이 상호 이익보호를 위한 연극적 대사였듯
연합국이라는 존재들이
해방된 한반도를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깊이 회의하게 만들었다.
민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공동의 삶을 방어하고 옹호하는 집단이어야 한다는
구체적 개념으로 바뀌어 있었다.
미국이 그런식으로 대했는데
소련이라고 다를 리 없는 것이고,
그 불신의 의식 속에서 소생하는 것은 민족뿐이었다.
그런데,
해방된 땅의 정치적 혼돈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백범 김구가
바로 자신과 똑같은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아, 백범!
김범우는 그 옛날부터 지녀왔던
그분에 대한 신뢰감 위에
감동의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후로 김범우는 백범에게 모든 기대를 걸게 되었다.
그분이 2월10일에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으로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 읍고함'이란 글은
민족의 현실과 장래를
진정으로 염려하고 사랑하는
피가 통하는 진실의 기록이었다.
'마음속에 삼팔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에 삼팔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70유(有) 3인 바 ,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 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물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하는 대목에서
그분의 인간적 진실을 보았고,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하는 대목에서는
지도자로서의 외로움을 보았다.
그러나, 김범우가 소망했던 바는
5월10일 남한에서 유엔 한국위원단 감시하에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고,
5월 14일 북한에서는
남한에 대한 송전을 중단함으로써
남북협상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남한에서는 8월15일에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했고,
북한에서는 9월 9일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로써 김범우의 소망은
그야말로 환상이나 망상이 되고 말았다.
40여 년 만에 가까스로 찾은 선택의 기회를
그처럼 망가뜨려버리는 현실 앞에서
그는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그의 망막 속에서
백범의 초상은 하얗게 표백되고 말았다.
그는 교단에서도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기계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 죄책감으로 학교를 떠나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인가 되풀이했던 것이다.
김범우는 홍교 앞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었다.
기차역까지 나가자면 천상 읍내를 관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홍교를 건너 길을 잡으면
장터거리와 극장을 지나
소화다리로 이어지는 삼거리에서
다시 경찰서나 우체국 등속의
관공서가 들어선 길이 끝나는 지점에 역이 있었다.
다른 하나의 길은
봉림리 앞길을 따라 소화다리를 건너는 것이었다.
그 길을 이용하면
항시 번잡스러운 장터거리 길은 지나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염상진이 남겨놓은 흔적은 장터거리 길보다는
관공서 길 쪽에 더 심할 것이었다.
문서방 말에 의하면 경찰서를 불태웠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기차역을 당장 다른 데로 떼어다 옮길 수 없는 한
그 길을 통과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염상진이 피해를 입히고 떠난 읍내의 모습 대하기를
과민하게 꺼리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며
김범우는 씁쓰름하게 웃었다.
그건 무엇 때문일까...
예상보다 심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심하면 심할수록 염상진의 쫓김은 그만큼 숨가빠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피해가 아무리 경미하다 하더라도
이미 죄인으로 단정된 염상진의 모습을
거기서 보아야 하는 것은 괴로움이었다.
결국 저 멀고 긴 날로부터 싹틔워 왔던
염상진에 대한 애정 탓이었다.
김범우는 봉림리 앞길을 지나 소화다리를 건너기로 했다.
고개를 떨구고 걸음을 빨리했다.
역에 다다를 때까지 결코 고개를 들지 않기로 했다.
소화다리에 첫발을 디디면서는 고개를 더욱 숙였다.
중간쯤에 이르렀을까, 김범우는 섬뜩한 느낌과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흙을 뿌리긴 했지만 거무칙칙한 색깔을 띠고 있는 얼룩이
피가 말라붙은 흔적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말라붙은 얼룩에서는
아직도 농도 짙은 액체의 끈적거림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는 전신에 끼쳐오는 한기에 전율하며 그 얼룩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처입은 자가 흘린 피에는 고통이 있을 뿐이지만
죽은자가 남긴 피는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저주하는 영혼인 것이다.
염상진은 코웃음치며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념은 심정적인 느낌을
비논리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고 일축할 것이고,
더구나 그는 양면 거울의 한쪽밖에는 볼 수 없는
외눈박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염상진이 저지른 행위를 차마 맞바라 볼 수 없어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걸었는데
그 결과는 마치도
그의 숙인 시야 안으로 기어들 듯
다리의 콘크리트 바닥에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문서방]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게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며칠 전에 들었던 문 서방의 말이 떠올랐다.
고개를 숙이고 걸었던 것은
염상진이 저지른 잘못을 일삼아 찾아내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경찰서뿐만이 아니라 읍사무소고 세무서고 우체국이고
다 불질렀다 한들 어떠랴.
인명을 어떤 객관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리 성급하게 살상하지 말고
그런 것들이나 다 태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김범우는 그 얼굴을 피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말라붙은 핏자국은 계속 나타났다.
그는 그것을 피해 걷기는 했지만 더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핏자국이 나타날 때마다
김범우의 흔들리는 의식 속에서
염상진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가 소화다리를 다 건넜을 때는,
한 개의 작은 점으로 변해 있던 염상진은
그의 의식 밖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흔들리는 의식을 애써 가누며
관공서들이 자리잡은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걷고 있어서
곧 나타난 불탄 경찰서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대로 지나쳤다.
그을음을 뒤집어쓴 2층 콘크리트 건물은
뼈대만 흉측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염상구, 염상진 동생] "성님, 성님."
한 사내가 길 건너 전매소 앞에서
왼쪽다리를 까딱거리며 김범우를 부르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수그린 김범우는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염상구] "아, 범우 성니임!"
사내는 목청을 돋우어 불었다.
그러면서도 왼쪽다리를 연신 까딱거리고 있는 품이
길을 건너올 낌새는 아니었다.
김범우는 역시 그 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고 걸어가고만 있었다.
[염상구]"니기미 씨펄,
귓구녕에 말뚝을 박은 것이여,
사람을 무시허는 것이여."
사내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혼잣말을 씹어 뱉듯이 하고는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김범우를 향해 길을 가로질러 뛰었다.
[염상구] "아 범우 성님, 나 잠 봅씨다."
사내는 거친 목소리와 함께
김범우의 어깨를 우왁스럽게 잡았다.
그때서야 김범우의 발길이 멎었고, 느리게 고개가 들렸다.
그러나 안개가 낀 것 같은 김범우의 눈은
바로 앞에 서있는 사내를 알아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염상구] "성님, 나 몰르겄소?"
사내가 자신의 가슴을 퍽 치며 턱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김범우] "상구 아닌가, 어쩐 일인가?"
김범우의 목소리에는,
알은 체한 상대가 면구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염상구] "아니 성님,
나가 지끔 동냥질허는 것도 아닌디
워째 사람을 요로크름 뜨광허고 찬바람 쌩나게 대헌다요?"
상구라는 사내는 눈꼬리에 힘을 모으며 완전한 시비조로 말했다.
염상진의 동생인 그는 표정마저 적의에 차 있었다.
[김범우] "이 사람아, 그 무슨 서운한 말인가.
내가 뭘 좀 생각하느라고 정신을 딴데 팔고 있어서 그리 됐네."
김범우는 뒤늦게 미안함을 느끼며 웃음을 지었다.
이제 눈에 끼었던 안개도 걷혀 있었다.
[염상구] "사람 무시혀서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지라?"
염상구는 적의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검은 동자가 반나마 가릴 정도로 작게 찢어진 눈,
살이라곤 붙어 있지 않은 강파른 얼굴에
주걱처럼 안으로 휘어든 턱,
성깔 사나움과 독기가 한데 어울려 있는 생김이었다.
바짝 마른 체구는 허약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굴의 느낌과 함께 날쌔고 강인해 보였다.
[김범우] "사람 하루이틀 대해봤나? 그런 말 함부로 하게."
김범우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3 [염상구] "금메 말이요.
돈 많고, 많이 배운 제겐들이 다 그려도
성님만은 고런 맘 묵을 사람이 아니란 것을 믿기 땀세
두 번씩이나 알은 체럴 혔는디도
몰라라 허고 간께
속이 뒤집힌 것 이제라."
염상구는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한결 선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염상구] "근디,
무슨 생각얼 그러크롬 짚이 험시로
워딜 가는 길이 당가요."
염상구는 금세 무엇을 탐지해내려는 듯한 눈초리로 물었다.
[김범우] "급한 일이 있어서 순천에 넘어가려는 참이네."
[염상구] "그러탕께!
내 눈을 못 속인단 말이여!"
염상구는 손가락으로 유난히 크게 딱 소리를 울려대며
스스로의 식별력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런 염상구를 김범우는 표정없이 바라보았다.
[염상구] "헌디, 찡은 가지셨는 게라?"
염상구가 김범우 앞으로 얼굴을 디밀 듯 하며 물었다.
그 어조나 태도가, 가졌을 리가 있나, 하는 투였다.
[김범우] "찡이라고?"
김범우는 염상구의 예상에 걸려들 듯 반문했다.
[염상구] "아, 대학공부꺼정 배우고,
선상질꺼정 허는 성님이 찡 하나 먼지 몰라서 묻는다요?"
비아냥거림과 으스댐이 뒤섞인 말투였다.
[김범우] "찡이라는 말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
무슨 찡이 필요하냐고 묻는 말이네."
말을 하면서 김범우는 무슨 신분증이 긴급히 발행되고 있음을 알았다.
[염상구] "성님, 자다가 봉창 뚜들기는 소리 고만 허씨요.
똥줄 타게 도망친 빨갱이가 산지사방에 백혀 득실거리는 판이고,
타향서 밀어닥친 진압군이 멀로 빨갱이 안빨갱이 럴 구별허겄소.
아, 성님을 벌교바닥에서나 김범우로 알아주제
벌교바닥 벗어나 뿔먼 누가 알아볼 것이요.
통행찡 없음사 영축웂이 빨갱이제.
나가 성님을 딱 본께로
기차 타로 역으로 나가는 것이 분명헌디,
찡을 안 가진 것이 틀림웂덜 않겄소.
찡 웂이 역에 가봤자 헛걸음질이고
되짚어 찡 맹글로 읍사무소로 와야 헐 것인디,
워씨 성님이 그 고상 허게 냅둘 수가 있겄습디여?
그려서 불러 세운 것이구만이라."
[김범우] "그랬었구먼. 고맙네."
김범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우울이 가슴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참 한심스럽게 변해가는 세상이라 싶었다.
[염상구] "고맙기는 머시 고마워라.
고런 것이나 내 심으로 도와야지라.
얼렁 맹글게 헐 팅께 항꾼 에 갑시다."
염상구는 활기차게 앞서 걷기 시작했다.
김범우는 염상구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쩝쩝 입맛을 다시고는 발을 떼어놓았다.
그는 염상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것도 그의 가슴을 덮는 우울이었다.
무슨 견원지간이라고
염상구는 또 형 염상진이와는 반대 입장에 서 있게 됐을까.
[염상구] "빨갱이 눔덜이 경찰서를 불질러부러서
읍사무소서 경찰업무를 보고 있구만요."
염상구는 마치도 자기가 경찰업무를 맡고 있는 양 이런 설명까지 했다.
순경 보조원인듯싶은 앳된 보초병이
염상구를 보자 거수경례를 붙여 올렸다.
[염상구] "어이, 수고허네."
염상구는 트림이라도 하려는 것같은 자세로
거드름을 피우며 인사를 받았다.
[염상구] "어이웨, 서 순경, 싸게 찡 하나 맹글소.
자네도 알제?
봉림 사시는 김범우 선상님.
우리 성님이신디 순천 넘어가신당마.
싸게싸게 맹글소."
염상구는 아무 거침이 없었다.
[서순경] "김 선생님, 나오셨는게라? 요리 오시씨요."
서 순경이라고 불린 사람이 반갑게 맞이했다.
그쪽에서는 알고 있는 모양인데
김범우로서는 안면만 있을 뿐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통행증은 담배를 반나마 피웠을 때 완성이 되었다.
[염상구] "와따메, 서 순경 글씨는
은제 봐도 한석봉이 찜쩌묵을 명필이여."
염상구는 통행증을 눈높이로 치켜들고 큰 목소리로 치하의 말을 하고 있었다.
[서순경] "선상님 앞에서 거 먼 소리여."
서 순경이 혀를 찼다.
[김범우] "수고하셨소."
김범우는 담배를 비벼 끄며 인사를 했다.
[염상구] "성님, 경찰서란 디 오래 있어야 존 것 웂응께 싸게 나갑시다."
염상구는 통행증을 들고 앞서 나갔다.
[김범우] "수고 많았네. 그만 자네 볼일 보소."
큰길로 나선 김범우는 손을 내밀었다.
[염상구] "머 따로 볼일이 있간디요? 역꺼정 가십시다."
염상구는 통행증을 건넬 생각도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역까지 바래다줄 모양이었다.
그만하면 오랜 정리를 위한 친절로도,
자기과시를 위한 시위로도 충분한데...
김범우는 염상구가 번거롭게 느껴졌다.
[염상구] "성님은 난리통에 워쩌고 지냈는게라?"
[김범우] "...대밭골에 숨어 있었네."
자네는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는 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인 줄 알면서도
김범우는 전혀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염상구]"엎어지면 코 달 디서 용허니 무사 혔구만요.
나는 소록도로 좆 빠지게 내뺐 구만이라.
문딩이덜 속에 숨어뿐께 참말로 안전헌 피난처등마 요.
쪼깨 징허기는 혀도 말이어라."
김범우는 씁쓸한 웃음을 씹었다.
염상구는 작년 9월에 결성된 대동 청년단의 열성단원으로
좌익 지하조직을 파내는 데 적잖은 공을 세웠을 것이다.
그건 형 염상진이와 맞서 싸우는 일이었고,
그래서 염상구는 그 일에 더 신바람이 났을지도 모른다.
만약 염상구가 도망을 못가고 붙들렸으면...
김범우는 그런 상상을 유발하고 있는 자신에게 강한 혐오감을 느꼈다.
[염상구] "성님, 찡도 맹글었겄다.
기차 탈 일만 남았응께 차나 한잔 하십시다."
[김범우] "나 바쁘네."
[염상구] "와따, 성님!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에 실 감아서 쓰는 법 있읍디여?
임허고 잠자리럴 혀야 아들을 볼 것이고,
기차가 와야 탈 것 아니겄어라우?
기차가 올라먼 40 분이나 남았응께
그새 따끈헌 커피나 한잔 대접허겄다는디."
염상구의 입에서는
금방 상소리라도 터져나올 것처럼 말이 거칠어져 있었고,
그 몸놀림도 여태까지와는 달리 주먹패의 냄새가 나도록 난잡스러웠다.
제 나름으로 다하고 있는 성의를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고,
그래서 화가 난 것 같았다.
제멋대로 열등감을 품고있는 사람을 대하기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를 김범우는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김범우] "이 사람이, 성님 성님 하질 말든지,
그리 상스럽게 굴질 말든지 하게.
내 맘은 바쁘고, 기차 시간은 모르고 해서 그런 것이지
내가 어디 자네 대접을 마다했는가!"
김범우는 귀찮은 오해를 막기 위해
정색을 하며 힘을 넣은 목소리로 말했다.
[염상구] "성님, 그러셨겄제라.
배운 것 웂이 무식허다 봉께로
소갈머리가 쥐창아리만 해갖고 오해 혔구만이라."
염상구는 금방 기분을 풀었다.
읍내를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는 소문 난 주먹패 염상구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머리를 숙이듯 하고,
귀찮을 정도로 친절을 베푸는 것은
형의 친구로서 오랜 정 때문만이 아님을
김범우는 대충 짐작하고 잇었다.
형의 친구라는 관계뿐이었다면
오히려 형에 대한 적개심을 옮겨 피해를 입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전과 차부에서 살다시피하는 염상구는
통학생들을 통해서
자신에 관한 그런저런 소문을 다 듣고 있었을 것이었다.
힘쓰는 자는 힘쓰는자 앞에서만 꼬리를 감춘다고 하던가.
김범우는 오래 전부터 염상구의 태도에서 그런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
[염상구] "가실께라.
다방에 성님 맹키로 서울식으로 말허는
솔~~찬이 이쁜 가시내가 새로 왔구만요."
염상구는 그 작은 눈을 찡긋하며 씨익 웃어보였다.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것인지,
제놈이 벌써 요절을 냈다는 것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고 웃음이었다.
읍내의 유일한 다방인 '포구'에는 손님이 뜸했다.
김범우는 거의 발길을 하지 않는 곳이어서
실내 분위기가 눈설었다.
낮에는 주로 관공서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날이 어두워지면서부터는 역전 주먹패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염상구] "야 가시내야, 찻잔 얌전허니 놓고
그 선상님 옆에 이쁘게 앉거라."
염상구는 차를 날라온 아가씨에게 우왁스럽게 말했다.
그건 거친 명령이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입술을 삐죽였을 뿐 전혀 노여운 기색이 없었다.
[김범우] "아니네, 아냐. 자네하고 따로 할 얘기가 있네."
김범우는 손까지 내저었다.
그는 엉겁결에 한 말이었는데,
말을 해 놓고 보니 염상구와 마주앉은 김에
그 동안의 사정을 듣는 것이 괜찮을 것도 같았다.
염상구도 피해 있긴 했지만
경찰서를 그처럼 제 집 안방 드나들 듯하고 있으니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을 것이었다.
[염상구] "식기 전에 쭉 드시씨요.
요 커피란 것이 쌉싸름하고 달착지근 헌 것이 마실만 허당께요."
일본 식민통치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채
커피는 미군정과 함께 전국적으로 퍼진 물건이었다.
[염상구] "지허고 헐 이야기가 먼 이야긴디요?"
염상구는 커피를 탕약 마시듯 단숨에 마셔 치우고는
김범우를 향해 고개를 뺐다.
김범우는 느린 동작으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뽑고 나서 염상구에게 내밀었다.
[염상구] "성님하고 맞 담배질 혀서 쓸란가 몰르겄소?"
염상구는 뒷머리로 손을 가져가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주먹패의 불량기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태도였다.
[김범우] "같이 나이 먹어가는 처지에 무슨 소린가. 어서 뽑아"
염상구는 연장자에게 술잔을 받을 때처럼
왼손까지 받쳐 담배를 빼고는,
얼른 통성냥을 들어 불을 켜서 김범우 앞으로 내밀었다.
몸에 익은 민첩한 동작이었다.
[김범우] "이번에 상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말에 씹혀 나온 담배연기는 김범우의 입술 가에서 뒤엉키다가 흩어졌다.
[염상구] "안직 몰르고 기신게라? 맞어, 성님은 우리허고는 달분께."
뒷말은 혼잣말로 바꾼 염상구는 자리를 고쳐앉더니
[염상구] "고 오살헐 눔덜이 쥑여도 무지막지허게 많이 쥑였당께요. 지끔도 계속 조사중인디, 오늘 아칙꺼정 확인된 것만 100 명이 넘었단 말이오."
돌변한 그의 얼굴에서는 살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김범우는 망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게 확실한 거냐고,
혹시 잘못된 조사가 아니냐고 묻는 말은 그의 의식 속에 갇혀 있었다.
[염상구] "100을 쥑였든 200을 쥑였든 고런건 다 과거지사고,
인자부텀은 우리덜이 헐 복수전이 남았구만요."
염상구는 손바닥으로 입술을 야무지게 훔쳤다.
[김범우] "복수전?"
김범우는 정신이 번쩍 들며 염상구를 노려보듯 하고 있었다.
[염상구] "하먼이라.
빨갱이 눔덜이 먼첨 칼을 뽑았응께
우리도 칼을 뽑아야지라.
고 숭악헌 눔덜이
다시는 고런 개지랄 못허게 헐라면
요분에 빨갱이 씨럴 말려뿌러야 허요.
섣부르게 혔다 가는 고것들이 또 까불 것잉께."
염상구의 살기등등한 말 속에서는
혈연으로서의 염상진의 존재는 찾을 수도 없었다.
완전한 편갈이만 있을 뿐이엇다.
나는 무엇인가. 김범우는 쓰디쓰게 웃었다.
[염상구] "엊저녁에 한바탕 콩을 볶았응께,
고런 식으로만 가먼 사나흘이먼 읍내 뿌리는 뽑을 것잉마요.
도망간 반란군하고 빨갱이 눔덜언 진압군허고 경찰이 쫓고 있응께."
[김범우]"콩을 볶다니?"
김범우는 직감은 하면서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물었다.
[염상구] "참 성님도, 빨갱이 총살도 몰르요?"
염상구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범우]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군."
김범우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염상구] "워디 빨갱이질 나선 눔만 빨갱이간디요?
소리 소문 웂이 과부 뱃때지에 올라타는 눔 맹키로
빨갱이질허는 세포도 있고,
빨갱이 앞잽이로 설레발친 눔덜도 있고,
빨갱이 숨키고 있는 집구석도 있고,
잡아 딜이고 봉께로 하로반만에 북군민핵교 교실이 다 찰 헹펜이구만요"
[김범우]"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다 알아냈단 말인가."
[염상구] "허어, 스파이 훈련인가 먼가 받았다는 양반이
워찌 그런 말을 다 묻는다요? 빨갱이만 조직 있고 우리 경찰은 핫바지 저구리 간디야"
김범우는 야무지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소화다리 위에서 피얼룩을 보았을 때처럼
김범우는 의식이 혼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순천을 빨리 다녀와야 되겠다는 생각만이 마음을 다급하게 하고 있었다.
[김범우] "그만 일어나세."
[염상구] "시간이 당아 멀었는디요?"
[김범우] "머리가 아파서 찬바람을 쐬야겠네."
김범우는 염상구를 묵살하고 일어섰다.
다방 안에는 한 창 유행되고 있는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가 흐르고 있었다.
김범우는 찻 값을 치르는 것도 잊어버리고
휘적휘적 다방을 벗어났다.
한낮인데도 거리에는 행인이 드물었다.
썰렁함이 읍내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김범우는 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손승호] "자네 범우 아닌기!"
김범우는 눈길을 들었다. 남국민학교 선생인 손승호였다.
[김범우] "승호 자네 무사했구만."
김범우는 손승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의 지난날을 알기 때문이었다.
[손승호] "말 말게. 꼭 죽는 줄만 알았네."
파리한 안색의 손승호는 고개를 저었다.
[김범우]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손승호] "노상에서 긴 말 할 수는 없고...
염상진이한테 붙들렸었지.
과거를 묻지 않겠으니 다시 전향을 하라고,
밤낮으로 시달리는데 못살겠더군."
[김범우] "그래서?"
[손승호] "끝까지 말을 안 들으니까 총까지 들이대더구만."
손승호는 감정의 동요 없이 말하며 입가에 찬웃음을 물었다.
그는 작년 6월까지만 해도 좌익에 발을 넣고 있었다.
그런데 우익의 탄압에 맞선
좌익 테러가 속출하면서부터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국제 공산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지역을 불문한 세력확장의 도구로 사용되는 허구성을 발견하고는
사상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버렸을 뿐 그 반대개념의 사상을 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상적 '전향'을 한 것이 아니라 사상의 공백상태에 있었다.
그가 괴로워 한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주의든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 변질을
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설득과 이해의 균형이 없이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그 어떤 주의나 사상보다는
차라리 원시상태가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손승호의 생각은 김범우의 생각과도 거리가 있었다.
김범우가 관심하는 '민족'이라는 자리에
손승호는 '인간'을 놓고 있는 셈이었다.
[김범우] "급한 일이 생겨 순천을 좀 넘어가는 길이네.
오후에 집에 있겠는가?"
김범우는 손승호에게 어느 때 없이 반가움을 느끼고 있었다.
[손승호] "그러지."
언제나 얼굴에 무게감을 지니고 있는 손승호는
약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염상구] "성님, 여그 기셨구만이라.
찡도 웂이 이 양반 워딜 가셨다냐 했구만요."
거침없이 떠벌리며 가까이 온 염상구가
손승호를 알아보고는 멈칫했다.
염상구와 시선이 마주친 손승호의 얼굴에도
순간적으로 적의가 담긴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손승호] "그럼, 다녀오소."
손승호는 김범우를 보지도 않고 말하고는 돌아섰다.
김범우는 염상구를 의식하며 빠른 걸음을 옮겼다.
염상구가 무슨 객적은 소리를 지껄일까봐
손승호와 한 발이라도 더멀어지고 싶었다.
[염상구] "저 개 좇 겉은 시끼가 사람 대허는 꼴 잠 보소.
삭신울 못 쓰게 맹글날을
폴세부텀 종그고 있단 것을 지눔이 알어야 쓸 것이여."
염상구가 살벌하게 내쏘며 탁 침을 뱉았다.
[김범우] "상구 자네, 그게 무슨 소리야!"
김범우는 휙 찬바람이 일도록 돌아서며 염상구를 노려보았다.
그 눈이 무섭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염상구] "성님, 위째 그러시오?
성님은 저 눔 과거를 몰라서 그러시오?"
염상구는 완연히 당황하고 있었다.
[김범우] "그래, 과거가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그게 삭신을 못 쓰게 만들 죄야?
그리고, 자네가 뭔데 그런 소릴 함부로 지껄여.
그럴 권한을 누가 자네한테 줬어!"
[염상구] "성님, 빨갱이덜이 전향했다는 말을
콩으로 메주 쑤디끼 믿을 수 있는 줄 아시오?
고것이 눈 개리고 아웅 허는 빨갱이덜 수법이랑께요.
고것이 아님사 요번 난리통에 워찌 저눔이 살아났겄소.
제1 착으로 죽었을 눔인디.
그렁께 저눔이 세폰지 아닌지 종그는 것인디,
고것이 워째 나빠라?"
김범우는 차가운 쇠붙이가 가슴팍에 섬뜩하게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염상구는 단순한 주먹패 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손승호에 대한 의심을 풀어 줄 필요를 느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괴롭지만 염상진을 입에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범우] "자네 내 말 똑똑히 들어.
아까 자네가 오기 직전에 무슨 말 했는지 아는가?
손승호 그 사람이 자네 형한테 붙들려 죽을 뻔했던 이야기를 하던 참이야.
자네 형은 다시 전향하라고 했고,
끝까지 말을 안 들으니까 총까지 들이대더라는 거야."
[염상구] "그 말을 워처케 믿냐니께요."
염상구는 교활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입가에 바르고 있었다.
형의 이야기에 조금도 감정변화를 보이지 않는 차가움이었다.
[김범우] "이 사람아, 그런 식으로 의심하자면 나는 어떻게 믿나."
김범우는 두려운 벽을 느끼고 있었다.
그 건 집단화된 의식의 단면이었던 것이다.
[염상구] "좋소, 지눔이 깨끔허니 발을 씻었다고 칩시다.
근디 워째서 나럴 대허는 뽄새가
똑 고름질질 흘리는 문딩이 대허디끼 허냐 고것 이구만요."
김범우는 말이 막혔다.
손승호의 생각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뒤늦은 발견이긴 했지만,
염상구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손승호의 실수였다.
한마디 말도 잘못 해서는 안될 어려운 국면이었다.
[김범우] "자네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감정이 상한 모양인데,
그럼 자네한테 먼저 묻겠네.
그 사람은 나하고 동창인데
자네는 무조건 이놈 저놈 하고 부르는구먼.
그 사람이 좌익을 그만두고 난 다음에
자네는 그 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나를 대하는 것처럼 예의를 지켜봤나?
자네가 깍듯하게 대하는데도 그 사람이 그러던가?"
김범우는 엉뚱한 허를 찌르고 있었다.
[염상구] "니기미, 나는 빨갱이 혔던 눔이고, 허는 눔이고 다 싫은께요..."
염상구는 시선을 떨구며 웅얼웅얼 말끝을 얼버무렸다.
김범우는 염상구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김범우] "자네가 여러 모로 수고하고 있는 것, 내 다 알아.
그런 수고가 더 효과를 나타내게 하려면
손승호 같은 사람을 자네가 먼저 잘 대하는 일이네.
내 말 알겠는가?"
[염상구] "아아..."
김범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잡고 있던 염상구의 손을 놓았다.
염상구는 굳이 역에까지 따라와서야 통행증을 내밀었다.
[염상구] "지가 표를 끊어디려야 허는디..."
염상구는 멋적은 듯 웃었다.
김범우는 그런 그의 얼굴에서 구박둥이로 자란 어린날의 모습을 떠올렸다.
주먹패가 되고, 형을 원수 대하듯 하는 오늘의 그는
그 옛날부터 예비된 것이기도 했다.
스무 평 남짓한 대합실에는
남루한 차림의 거지가 웅크리고 잠들어 있을 뿐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김범우는 개찰구를 나섰다.
노천 플랫폼에는 네댓 사람이
기차가 올 광주 쪽 철로로 몸들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김범우는 천천히 걸어 그들과는 거리를 두고 멈춰섰다.
역사 양옆으로 길게 드리워진 탱자나무 울타리로 눈길이 갔다.
잎이 거의 다 떨어진 탱자나무의 성긴 가지 사이로
서너 명의 코흘리개들 모습이 얼비쳐 보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어린것들의 조잘거림도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무수한 가시가 돋아 있을 가지 사이사이에
샛노란 탱자들이 매달려 있었다.
가시에 찔리지 않을 자리에 열린 것들은
벌써 다 따가버리고
가시 사이에 열린 것들만 남아 있는 것이다.
손쉬운데 달린 열매들은 노랗게 익어보지도 못하고
진초록 몸의 아기열매 때 벌써
코흘리개들 손에 들어가 구슬치기의 구슬 노릇을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꼬마들은 가시 사이에 매달린 탱자들을 따려고 열중해 있는 것이었다.
김범우도 어렸을 적에 억센 가시에 손을 찔려가면서도
한사코 탱자를 따내려고 애를 썼었다.
곰보딱지로 울퉁불퉁하게 못생긴 유자에 비해
탱자는 매끈하게 잘생겼으면서도 별로 쓸모가 없었다.
향기도 유자만 못했고, 맛은 더구나 비교가 되지 않았다.
몇 번 굴리고 던지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발로 밟아 터뜨리거나
시궁창 같은 데 처넣었다.
그러면서도 한사코 탱자를 딴 것은
그 샛노란 색깔의 동그란 생김에 이끌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탱자나무는 대부분 서민 집들의 앞울타리 노릇을 했고,
대나무는 뒷울타리 노릇을 했다.
억센 가시를 가지마다 촘촘히 달고 있는 탱자나무는
그 생김과는 다른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
옛날에 자식 다섯을 데리고 과부가 살았다.
남편이 남기고 간 것이 없는 살림살이는
혼자의 힘으로 아무리 뼈가 휘도록 일을 해도 자식들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몇 년을 이 앙다물고 살아낸 과부는
더는 견디질 못하고 병이 들어 눕고 말았다.
그대로 굶어죽게 된 형편이었다.
그 소문이 나자 하루는 어떤 노파가 찾아왔다.
산 너머 부잣집에 큰딸을 소실로 보내면 논 닷마지기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큰딸은 열다섯 살이었다.
과부 어미는 딸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어서 노파가 대신하기로 했다.
노파의 말을 들은 처녀는 하룻밤 하루낮을 운 끝에
그리 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노파한테 내세운 조건이 있었다.
닷마지기의 논 대신 그 값에 해당하는 쌀을 달라는 것이었다.
하나도 어려울 것 없는 조건이었다.
처녀는 쌀을 받은 날 집을 떠났다.
늙은 부자와 첫날밤을 지낸 다음날 저녁
처녀는 뒤뜰 감나무에 목을 매고 말았다.
늙은 부자는 처녀의 죽음을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속았다고 펄펄 뛰며 당장 쌀가마를 찾아오라고 불호령을 쳤다.
하인들이 부랴부랴 처녀의 집으로 갔으나 식구들은 간 곳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늙은 부자는
더욱 화가 나서 처녀의 시체를 묻지 말고 산골짜기에 내다 버리라고 명령했다.
저런 못된 것은 여우나 늑대한테 뜯어먹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녀의 시체는 정말 내다 버려졌다.
그런데 그날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치며
처녀의 시체를 업고 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건 처녀와 남몰래 사랑을 나누어왔던 사내였다.
사내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평장을 했다.
그런데 다음해 봄에 그 자리에서 연초록 싹이 터 올라왔다.
그 싹은 차츰 자라면서 몸에 가시를 달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때서야 그것이 애인의 한스런 혼백이
가시 돋친 나무로 변한 것을 알았다.
아무도 자기 몸을 범하지 못하게 하려고
온몸에 가시를 달고 환생한
애인의 정절에 감복한 사내는
평생을 혼자 살며 그 한을 풀어주기 위해
산지사방에 나무 심는 일을 했다는 것이었다.
김범우가 어렸을 적에 무심코 들어넘긴 그 전설을
무엇인가 깨우치듯 떠올린 것은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게 된 어느날 이었다.
그건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농경사회의 부와 빈곤이
고질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기름진 평야지대에서 생성된 서민이나 소작인들의 마음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드넓은 곡창지를 품고 있는 전라도 땅과
탱자나무 전설과 소작 농민들의 봉기였던 동학란과
일제치하에서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자가용 비행기를 가졌다는 전라도 어느 지주와...
김범우는 염상진과는 다른 고통으로
사회주의 서적을 덮고 자정을 넘긴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멀리서부터 기적이 울려왔다.
김범우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 색깔이라서 더욱 육중하게 느껴지는 기차가
역이 가까워 졌음인지 흰 연기를 뿜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때서야 처남 신석주를 떠올리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7. 그리고 청년단 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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