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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7장 그리고 청년단
등장인물들 염상구, 역전 차부, 떡장수, 뱅골댁, 고구마장수 (녹동댁)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 건준, 전국텅년단체총동맹 대동청년단, 소록도 고흥 뱀골고개, 소화다리 제석산, 정하섭 정사장 정현동사장 술도가, 낙안댁(정하섭 모친) 소화, 월녀(무당) [Jo Jeong-rae Tales] Taebaek Mountain Range Volume 1 Chapter 7 and the Youth Group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제 1 부 한의 모닥불 7장. 그리고 청년단 염상구는 양쪽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찔어넣고 단음의 휘파람 소리를 내며 역전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삐뚜름하게 치켜올라간 양쪽 어깨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장단이라도 맞추듯 건들거리는 상체는 천상 주먹패의 모습 그대로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 생각도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몸짓으로 걷고 있으면서도 그의 작은 눈은 마당의 좌우와 건너편 차부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염상구] "지기미, 하루 벌어 하루 묵고 사는 것들이 목심은 드럽게 아까운 것인갑구만." 그는 이빨 사이로 찍 침을 내 쏘았다. 침은 반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가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나고는 멀찍이 떨어졌다. 차부고 역전이고 도둑맞은 집구석처럼 썰렁한 것이 그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길을 떠나자면 통행증을 일일이 발급받아야 하는 형편이니 차부나 역에 손님이 줄어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날이면 날마다 자리 다툼을 하던 행상들마저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다. 그만큼 지금의 읍내 분위기가 살벌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도, 하루 벌어 하루먹기가 다급한 가난뱅이 신세에 그래도 목숨을 지키겠다고 그리 약삭빠르게 구는 꼴들이 역겨웠다. 떡장수, 엿장수, 과일장수, 순대장수, 오이장수, 고구마장수, 이런 행상들이 각기 함지박이며 목판이며 광주리에 물건들을 담아들고 도착하고 떠나는 차를 따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악다구니 쳐대는 시끌벅적함이 어우러져야 차부나 역전의 기분이 제대로 나는 것이었다. 염상구는 그 소란 속을 헤치고 다니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가슴 뻐근함을 느끼고는 했었다. 염상구는 길을 건너려다 말고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잡화상 옆에 쪼그리고 앉은 두 여자 행상을 향해서였다. 떡과 고구마를 차려놓고 앉은 두 여자는 염상구가 자신들에게로 오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찔끔 긴장했다. 그리고, 두 여자는 시침을 떼며 이야기에 열중하는 체했다. [염상구] "아짐씨들, 무슨 이약이 그리 재미지요?" 좌판에 다다른 염상구가 불뚝스럽게 내질렀다. [떡장수] "아이고메, 요게 뉘시다요? 감찰님 오시는 것도 몰라보고 두 년이 새살까니 라고... 어여 오시씨요." 깜짝 놀란 시늉을 하며 자리를 차고 일어선 떡장수 여자가 반가움을 과장하고 있었다. [고구마장수] "하먼이라, 하먼이라." 엉거주춤 따라 일어선 고구마장수가 꺼칠하게 마른버짐이 핀 얼굴에 억지웃음을 지어보이며 굽신거렸다. [염상구] "아짐씨는 머가 하먼이라, 하먼이라요?" 염상구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꼬리를 세웠다. [고구마장수] "긍께로..." 고구마장수가 당황한 나머지 미처 말을 꾸며대지 못한채 질렸고 [떡장수] "감찰님, 금메 요 여편네는 워낙이 빙신이라 높은 양번 덜 앞에만 섰다 허면 갱신을 못헌당 께요. 멀리서 순사만봐도 오짐얼 찔금거리는 빙신인디, 요러크름 감찰님을 딱 맞바라보고 서붕께 헛소리 나올만 안 허겄소? 감찰님이 이해허셔야 쓰겄구만이라." 떡장수가 눈치 빠르게 둘러대고 있었다. [염상구] "날 첨 보간디 그래라?"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염상구의 어조는 '감찰님' 답게 점잖게 변해 있었다. 소학교 적에 긴칼을 찬 일본순사만 보면 오금에 오소소 찬바람이 감기고는 했던 경험을 통해 그 촌스런 여편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고, 자신을 그런 '높은 양반'으로 대해 주눅이 들 정도라는 것은 열 번 들어도 기분 나쁜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떡장수] "떡이 따끈헌디, 한 쪼가리 허실랑게라?" 떡장수가 금방 떡을 떼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날이 무뎌 보이는 부엌 칼을 집어들었다. [염상구] "어허, 점잖찮게." 염상구는 엄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팔을 내젓고는 [염상구] "헌디, 썩은 괴기에 쉬파리 앉디끼 허든 예펜네 덜이 다 워디로 가부렀소. 빨갱이허고 내통 허다가 다 뽕빠지게 도망간 것 아니라고?" 썰렁한 차부고 역전을 휘둘러 억지소리를 했다. [떡장수] "워메 감찰님, 사람 잡을 소리 허덜 마씨요. 아, 쉬파리가 앉을 썩은 괴기가 있어야 쉬파리가 끓제라. 타작 마당 검불 쓸어불 디끼 요리 손님이 웂는디 장사 안 나오는 것이야 당연지사제라." 떡장수가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면서도 야무지게 말하고 있었다. 말을 듣고보니 그럴 법한 이치였다. 돈을 좇는 장사치들의 눈치만큼 재빠른 것도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 쉬운 생각을 까맣게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염상구는 그런 자신의 허점을 가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좌판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다시 억지소리를 했다. [염상구] "필경 여그 장사꾼덜 속에도 빨갱이 눔덜 꼬랑댕이가 숨어 있을 것인디." 염상구는 떡장수 여자의 눈을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었는데, 그 작게 옆으로 찢어져나간 눈에는 섬뜩섬뜩 냉기가 뻗쳐나오고 있었다. [떡장수] "고런 눈치 있음사 얼렁 감찰님헌테 귀뜸해야제라. 우리가 누구 덕에 사는디, 하먼 허고말고라." 떡장수 여자는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듯 굳어진 얼굴로 입술을 놀리고 있었다. [염상구] "바로 그거요. 쬐끔만 요상허다 싶으먼 꼭 나헌테 연락 취해야 쓸 것이요. 만일에 여그서 무신 일 생겼다 허먼 그날로 장사판 싹 엎어 뿔팅께." 염상구는 여자의 눈을 응시한 채 한마디 한마디를 상대방 눈 속에 박아 넣듯이 낮고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해나갔다. [떡장수] "하먼이라, 하먼이라." 떡장수 여자는 더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염상진] "명심허고, 장사 잘 허씨요." 염상구는 눈길을 거두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떡장수] "워째야 쓸께라, 궐련 값이라도 디레야 헐 것인디 아직 마수걸이도 못혔으니..." 떡장수는 안절부절 못했고, 고구마장수도 빈손을 허둥대고 있었다. [염상구] "판이 요리 시장스러운디 오늘은 그만두씨요. 우리 아덜헌테도 일러놓겄지만, 행여 모르고 오먼 나가 댕겨갔다고 말허씨요." 염상구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돌아섰다. [고구마장수 떡장수] "감찰님, 고맙구만이라, 고마워라." 두 여자는 염상구의 뒤에다 대고 허리를 꾸벅거렸다. [고구마장수] "뱅골댁, 워쩔라고 고런 약조를 다 허는가?" 고구마장수가 후유 한숨을 내쉬며 떡장수를 타박하듯이 말했다. [떡장수] "음마, 녹동댁! 한마당서 한시에 당헌 일임스롱도 똑 넘 일 말허디끼 허는 심뽀는 또 머시여?" 뱅골댁은 어떤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며 한바탕 대거리를 벌일 것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고구마장수 녹동댁] "뱅골댁, 나가 넘 일 말허디끼 허 잔 것이 아니라 그런 약조헌 것이 겁이 난 께 허는 소리 아닌가." 녹동댁이 마른버짐 핀 얼굴을 훔치며 기운없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떡장수, 뱅골댁] "워쩌겄능가, 나중 당헐때 당허드라도 당장 급헌 불길 꺼야제. 자네도 고 독오른 눈구녕 봤제? 독새 눈깔이 그럴라등가, 도깨비 외눈깔이 그럴라등가. 시퍼렇게 날 선 백정눔 칼끝으로 찢어논 거 맹키로 생긴 눈에 그 눔이 퍼런 불 켰다 하먼 지 정신이 아닌께. 고때 즈그 아부지가 훈계허로 나서먼 지 애비도 찔러죽일 눔이란 말이시. 아까도 눈치 싸게 그러크름 허지 안했음사 워찌 됐을지 아능가? 내 떡 함지고, 자네 고구마 소쿠리고 역전 마당에 폴세 패대기 쳤을 것이네. 그리 돼 불먼 속 씨리고 아픈 것은 누군가?" 뱅골댁은 수심 깃들인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고구마장수 녹동댁] "무작시런 눔, 우리 맹키로 불쌍헌 장사꾼 껍데기 뱃겨묵는 저런 눔을 감옥에 쳐너야 허는 디, 순사들은 멀 허는고." [떡장수 뱅골댁] "이 사람, 자다가 봉창 뚜들기는 소리 허고 앉었네 웨. 저눔이 쫄때기 순사알기를 지 발샅에 때만치도 못허게 아는 눔이여. 아, 못헐말로 저눔이 장바닥에서고 역전에서 부리는 세도가 경찰서장이나 읍장 보담도 더 씬 것을 몰라서 허는 소린가? 저눔 비우짱 거실리고, 눈밖에 나서 고이 장사 해묵을 장사꾼은 크나 작으나 이 벌교바닥에는 한나 또 웂네." " [떡장수, 뱅골댁] 참말로, 무신 인종이 그리 독헐꼬, 소문에는 허리끈에다 칼을 열 개 씩이나 차고 댕긴다든디, 그짓말 이겄제?" [고구마장수 녹동댁] "아녀, 참말일 것이구만, 저 눔이 누군지 모르고 뎀비다가 손등에 칼 침 맞은 젊은 장사꾼들이 더러 있응께." [고구마장수 녹동댁] "그러다가 사람 쥑이기라도 허먼 워쩔라고 칼을 열 개썩이나..." 녹동댁은 팔짱을 끼며 부르르 떨었다. [떡장수 뱅골댁] "칼이 크지도 않고 똑 가운데 손꾸락 만썩 허다데. 고걸 뽑아 던지는디, 워찌나 몸짓이 날랜지 번개 같다등마. 허고, 칼이 꽂혀도 꼭 죽지 않을 만한 디만 골라서 꽂힌다드랑께. 손등, 손목, 폴, 장딴지, 허벅다리 같은..." 뱅골댁은 어느덧 자신의 신세 서글픔이나 염상구에 대한 미움은 사그라지고, 믿기 어려운 그의 무용담에 신명이 오르고 있었다. [고구마장수 녹동댁] "고것이 재주는 재주시." [떡장수 뱅골댁] "하먼, 재주치고도 보통 재주는 아니시. 고런 귀신도 곡을 헐 재주에다가, 철다리 한가운디서 기차가 코앞에 닥칠 때 까정 버팅기다가 아래 갱물로 뛰어내린 배짱을 가졌응게로 왈패 오야붕도 해묵고, 청년단 감찰 자리도 해묵제, 아무나 고런 자리 앉겄능가?" [고구마장수 녹동댁]"긍께 말이시, 근디, 즈그 엄니한테 효자 노릇 헌다는 소문이든디 참말이까 몰라?" [떡장수, 뱅골댁] "참말일 것이네. 즈그 성은 일정 때부텀 공산당 허니라고 미쳐서 도망댕기고, 해방이 되니께 더 날치다가 감옥살이허고 또 도망댕기고 허니라고 즈그 엄니헌테 뜨신 밥 한 그럭 올릴 돈벌이를 원제 했드랑가. 해방되고 이날 이때꺼정 삼시세끼 밥 묵고 사는 것이 다 누구 덕인디. 세빠지게 농새짓고도 세끼 밥 찾아 묵기 심든 시상에 왈패짓혀서 홀엄씨 세끼 밥 찾아 먹이먼 그보다 더 헌 효자가 워디 있겄는가." [고구마장수 녹동댁] "내 새끼도 높은 핵교 공부시키기는 글른 팔자, 저눔 맹키로 왈패 오야붕이나 되얐으면 쓰겄네." [떡장수 뱅골댁] "이 사람아, 말이 씨 되는 법이시." 두 여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멀건 웃음을 지었다. 다 식어빠진 고구마 위에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그 투명하고도 섬세한 무늬의 날개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싸리나무의 명주실보다 가는 끝가지에 살폿 앉아 네 개의 투명하게 붉은 날개를 비스듬히 치켜세우고 허공에 미세한 율동의 파문을 일구던 여름의 생명력을 고추잠자리는 이미 잃고 있었다. 10월이 저물어가는 찬 기운 서린 대기 속에서 고추잠자리는 한 생애를 살아낸 고단한 육신을 싸늘하게 식은 고구마 위에 부려놓고 있었다. 여자가 파리를 쫓듯 손부채를 부쳤지만 고추잠자리는 날아갈 줄을 몰랐다. 손바람에 늘어뜨린 날개가 둔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고구마장수 녹동댁] "무신 눔의 잠자리가..." 여자가 중얼거리며 마디 굵은 손가락으로 고추잠자리를 잡아 무심하게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허공에 떠오른 고추잠자리는 본능적인 날갯짓을 했지만 몸은 비상을 하지 못하고 아래로 아래로만 떨어져 내렸다. 푸른 음향이 맑게 흐를 것 같은 10월의 깊은 하늘만이 한 마리 고추잠자리의 임종을 침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철교 아래 선창에서 일본 선원을 찔러 죽이고 도망쳤던 염상구가 읍내에 다시 나타난 것은 해방과 함께였다. 그는 이미 쫓김을 당하는 살인자가 아니었다. 일본놈을 용감하게 처치한 당당한 독립투사로 변해 있었다. 그가 물건 훔쳐내다가 들켜 살인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독립투사로 자처하는 그의 앞에서 그 누구도 감히 부정을 하지못했다. 자취를 감추었던 몇 년 사이에 그는 기골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언변도 변사 뺨칠 만큼 늘었고, 특히 온몸에 서늘한 살기를 감고 있었다. 염상구가 읍내에 나타나서 제일 먼저 벌인 일이 장터거리의 싸움판이었다. 사람들이 운집한 장터거리에서 벌어진 그 싸움은 주먹패의 '오야붕' 쟁탈전이었던 것이다. 물론 싸움을 건 것은 염상구였다. 치고 박고,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피가 흐르고 하다가 사태가 불리해진 상대방이 칼을 쑥 뽑아 들었다. '땅벌'이란 별명을 가진 그가 위협만으로 칼을 뽑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염상구는 상대방을 노려보며 서늘한 웃음을 흘린 채 태연하게 서 있었다. 땅벌이 뭐라고 소리치며 칼을 휘두르고 돌진했다. 염상구의 손에서 단칼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것은 그때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연거푸 세 개가 날아가 땅벌의 어깨, 팔, 허벅지네 꽂힌 것이다. 땅벌은 비척거리다가 땅바닥에 쓰러졌고, 염상구는 서늘한 웃음을 입가에 문 채로 천천히 다가가 왼발로 땅벌의 가슴팍을 밟고는 어깨에 박힌 단칼을 빼냈다. 그리고는 칼에 묻은 피를 땅벌의 이마에다 문질러 닦으며, [염상구] "워째, 요만 허면 항복해야겄제?" 그러나 이빨을 응등문 땅벌은 말이 없었다. 염상구는 땅벌의 팔에 박힌 두 번째 칼을 뽑았다. 거기에 묻은 피를 땅벌의 왼쪽 볼에다 문질러 닦으며 [염상구], "워째, 안직도 항복을 못 허겄어?" 역시 땅벌은 염상구를 노려본 채 말이 없었다. 염상구는 허벅지에 박힌 세 번째의 칼을 뽑았다. 그것에 묻은 피를 땅벌의 오른쪽 볼에다 문질어 닦으며, [염상구] "억울하먼 은제라도 또 도전혀. 니눔 아가리로 항복헐 때꺼정 상대혀 줄 팅께." 염상구는 세 개의 칼을 한 손아귀에 몰아 쥐고 돌아섰다. 몇 겹으로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이 끽소리도 내지 못하고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틔웠고, 염상구는 훤하게 트인 그 길을 유유하게 걸어 사라졌다. 그들의 '오야붕' 쟁탈전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상처자리를 꿰맨 땅벌은 실을 뽑자마자 희한한 설욕전을 제안해온 것이었다. 그 며칠 사이에 주먹패의 반 이상은 염상구의 손아귀 안에 들어 와 있었다. 땅벌이 제안한 것은, 철교의 중앙에 똑같이 서서 누가 더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버티다가 아래 바닷물로 뛰어내릴 수 있는지를 겨루자는 것이었다. 완전히 썰물이 되었을 때는 물 깊이가 얕으니까 밀물 때와 기차 시간을 맞추자는 말까지 해왔다. 염상구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좋다는 답을 보냈다. 둘이 다 똑같이 무릅쓰는 위험이었고, 피할 수 없는 마지막 도전이었던 것이다. 밀물이 실리는 시간과 순천에서 오는 통학차 시간이 거의 비슷하게 맞았다. 다음날 바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심판은 양쪽 부하들이 보기로 했고, 경찰서나 역에 알려지면 제지를 당하게 될 것이기에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서 지는 자는 영원히 벌교바닥을 뜬다는 조건이었다. 다음날 해거름에, 순천에서 광주로 뻗어나간 철로의 벌교포구를 잇는 철교 중앙에 땅벌과 그 동안 '쌍칼'이란 별명이 붙은 염상구가 서로 등진 채 수영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땅벌은 순천만으로 이어지는 선수머리를 향해 서 있었고, 염상구는 포구가 좁아지는 소화다리 쪽을 향해 서 있었다. 밀물로 실려 있던 바닷물은 썰물이 되기 시작했다. 철교 아래에는 스물서너명의 양쪽 부하들이 숨을 죽이고 모여 앉아 있었다. 그때 회정리 3구를 돌아오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검은 지네같은 기차의 꿈틀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기차는 삽시간에 '중도 들판'을 가로질러 회정리 2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철교는 2구를 경계짓고 있는 방죽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철교의 교각은 모두 아홉 개였는데, 그들은 중앙 교각 위에 서 있었다. 기차가 "뙈액-" 기적을 울리며 검은 괴물처럼 철교로 진입했다. 그 순간 기차와 그들과의 거리는 교각 네 개의 간격으로 좁혀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검은 괴물은 교각 한 개의 간격을 먹어 치웠다. 그리고 또 순식간에 교각 두 개째의 간격을 먹어치웠다. 검은 괴물이 세 개째의 간격을 반쯤 먹어들 때였다. 한 사람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땅벌이다!" 하는 철교 아래의 짧은 외침은, 요란하게 울리고 뒤엉키는 쇠의 마찰음에 섞이고 말았다. 검은 괴물이 네 개째의 간격을 먹어치우려고 돌진해오는 순간 나머지 한 사람이 바닷물을 향해 뛰어내렸다. 그 사람의 몸이 철교와 바닷물 사이의 중간쯤 되는 허공을 지나고 있을 때, 기차는 조금 전에 그 사람이 서 있었던 자리를 박차고 지나가고 있었다. "쌍칼이 이겼다아아." 철교 아래서는 긴 환성이 터져오르고 있었다. 주먹의 세계는 비정했다. 염상구가 헤엄쳐 올라오기를 기다려 땅벌의 부하들은 그의 앞에 서슴없이 무릎을 꿇었다. 충실한 부하 되기를 맹세하는 것이었고, 염상구는 당당하게 '오야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땅벌은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자리를 떠났고, 밤이 어두워진 다음에 옛 부하 몇 명의 전송이 아닌 감시 속에서 고리짝만한 크기의 가방 하나를 들고 광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하여 땅벌이 장악하고 있었던 읍내의 권한이 고스란히 염상구의 손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장터를 중심으로 한 역전 일대의 텃세권, 상점들의 정기적인 상납권, 하나뿐인 극장의 기도권, 부잣집의 경조사 보호권, 그러나 무엇보다도 염상구의 가슴을 뿌듯하게 했던 것은 읍내 치안대의 장악에 있었다. 그것은 해방과 동시에 여운형이 발족시킨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 벌교지부에 소속되기를 바라며 자생적으로 생겨난 조직이었다. 치안대장은 유지급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그건 명목상 내걸어놓은 이름일 뿐이었고 실권은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염상구로서는 여운형이고 건준이고 알바 아니었고, 지부에 소속이 안되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목전에 펼쳐져 있는 권한을 행사 할 수 있게 된 것만이 중요한 현실이었다. 치안대의 실권자로서 염상구가 제일 먼저 내세운 것이 자신의 이력 변조였다. 일본 선원의 '살인'이 '독립운동'으로 바뀌었고, 그러므로 염상구는 당연하게 '독립투사'였던 것이다. 치안대의 실권자와 독립투사의 경력은 금상첨화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그 사실을 목청 높여 선전하고 강조하고 다녔지만 그 뻔한 거짓말 앞에서 누구 하나 바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이미 읍내에는 제 정신 바로 박힌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두 가지 사건을 벌인 쌍칼 염상구에 대한 소문이 윤색까지 되어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다 알게 친일을 했던 자들이 무슨 명목을 붙여서든지 애국의 탈을 만들어 쓰려고 급급한 판에 염상구 정도의 이력 변조는 아주 양심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40년에 이르는 일제의 지배를 받는 동안 벌교 읍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근동에서도 일인을 살해한 것으로는 염상구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단순한 완력이나 배짱만이 아니라 권력행사라는 감미에 맛이 들린 염상구는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모든 치안권이 경찰 중심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그 언저리를 떠나지 않았다. '애국'이라는 말이 너절너절 넝마가 되도록 너도 나도 목청 돋우어 외쳐대며 날이면 날마다 생겨나느니 정당이고 사회단체였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결성되는 청년단체도 허다했다. 바로 그 '청년'이란 이름이 붙은 단체가 염상구의 기식처였다. 그렇다고 염상구는 아무 청년단체에나 몸을 담는 것이 아니었다. 실질적 권한행사를 할 수 있는 곳, 전망이 확실히 보장된 단체만을 골랐다. 그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경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로서는 경찰에서 후원하는 단체에만 들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는 치안대가 해산되자 전국 청년 단체 총동맹의 지부 실권자가 되었고, 1947년에 이르러서는 정치발판을 굳힌 이승만이 결성한 대동청년단의 지부 실권직인 감찰부장 자리에 앉았다. 그의 이러한 권력지향성은 어찌할 수 없이 형 염상진과 대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염상구는 형과의 그런 피할 수 없는 대치에 대해서 추호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형과 그렇게 맞설 수 있게 된 것을 통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염상구의 가슴 저 깊은 곳에는 어린날로부터 차곡차곡 쌓아둔 형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었다. 닭똥집을 언제나 혼자서만 야금야금 처먹었던 형, 다 해진 고무신을 벗어 던져주고 새 고무신을 신으면서도 뽐내기만 했던 형, 그 형이 얄밉고 밉살스럽다 못해 더는 견딜수가 없어서 이 세상에서 없어져 주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병에 걸려 죽기를 바랐고, 수영을 하다 물에 빠져 죽기를 바랐다.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자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를 얼마나 궁리했던가. 소학교를 끝으로 상급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형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와 형을 함께 죽일 작정을 했었다. 가슴에서 그런 증오심이 끓고 있는데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그 하찮은 숯장사 하는 방법을 따라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의 구박과 편애, 형의 자만과 무시 속에서 그나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다독거림이 있어서였다. 어머니가 아무도 몰래 건네주던 콩누룽지를 받아들고 뒷산 팽나무 아래서 얼마나 울었던가. 콩누룽지 한 덩어리가 고마워서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형만이 아니라 자신도 사랑하고 있다는, 어머니의 정이 고마워 목이 메었던 것이다. 형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선상님'이 되기를 목빠지게 기다린 아버지의 뜻도 거역하고 농사꾼이 되자 아버지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을 것처럼 펄펄 뛰다가 끝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그때 얼마나 고소하고 시원했던지 아무데나 찍찍 침을 내 깔기며, 씨엉쿠(시원쿠) 자알 됐다, 속 씨언하다, 소리를 몇 수십 번도 더 했었다. 일본 놈을 죽이고 피했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와보니 아버지는 이미 죽고 없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형에 대한 낙담이 원인이었다. 아무런 슬픔을 느낄 수가 없었다. 묘를 찾아가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머니를 보아 마지못한 걸음을 했었다. 두 번 올린 절도 건성이었고, 눈물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런데, 형에 대한 원한이나 복수심은 아버지에 대해서 보다도 몇 갑절 더 심한 것이었다. 염상구가 형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 것은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공산당의 모든 조직이 지하로 잠적하면서부터였다. 염상구로서는 공산당이나 사회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를 아예 느끼지 않았다. 그건 적이었다. 경찰에서 그렇게 단정했으니까 적이었고, 형이 가담해 있으니까 더욱 적이었다. 땅속에 숨은 두더지도 잡아내는 판에 느네 놈들이 지하로 숨어들었다고 하지만 땅속으로 기어들어간 것도 아닌 바에야 누가 이기나 보자. 염상구는 이런 승부욕을 내걸고 공산당 색출에 혈안이 되어 날쳤다. 형이 미쳐서 하고 있는 일에 훼방을 놓고, 형이 자기에게 쫒기는 신세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전신이 근질근질해지며 가슴 한복판이 환하게 뚫리는 통쾌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공산당을 잡아내는 일은 한마디로 형에게 사무친 복수를 할 수 있어 좋고, 공을 세워 권한을 키워갈 수 있어 좋고,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라 신명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염상구의 그런 속앓이를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그들 형제간의 행동을 놓고, 집안 망칠 종자들, 몹쓸 인종들, 하고 혀를 찼다. 염상진이 체포되어 1년 실형을 받게 된 것은 내용적으로 염상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염상구는 오히려 그 기회를 놓친 것은 애석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염상구가 형을 잡아놓은 것으로 지레 치부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들 형제가 극적으로 부딪힌 것은 금년 3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 시행을 발표하고 나서였다. 전국적으로 경찰과 대동청년단에서는 총선거 실시를 위한 전면적 준비작업을 전개했고 이에 맞서 좌익에서는 총선거를 저지하려고 모든 지하조직을 표면화시켜 총력전을 개시했다. 그래서 4월로 접어들면서 좌익의 반대폭동은 전국에서 극렬하게 벌어졌다. 염상진도 부하들을 이끌고 경찰서를 습격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경찰력만이 아니라 청년단까지 합세된데다가 화력의 열세는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결과적으로 부하 서너 명만 잃어버린 무모한 행위가 되고 말았다. 청년단이 주먹패의 못자리판으로 민폐나 끼치고 정치행동대 노릇이나 하는 줄 알았지 경찰과 합세해서 전투병력화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소화다리를 건너 재석산 쪽으로 퇴로를 잡으며 염상진은 청년단의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동생 상구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고 잇었다. 그리고 어두워서 상구와 맞닥트리지 않은 것을 무엇보다도 다행으로 여겼다. 한편, 예상했던 것보다 가볍게 적을 물리치게 된 염상구는 형도, 좌익이라는 것도 우습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형을 정면으로 맞바라 보지 못한 것이 그렇게 애석할 수가 없었다. 염상구는 새벽같이 부하들을 동리마다 풀어 남자가 밤 사이에 집을 비운 집을 일제히 조사해오라고 명령했다. 밤샘 노름을 하지 않는 놈이라면 바로 경찰서를 습격하고 도망친 빨갱이일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염상구의 이 계산은 한 발이 늦고 말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이 불찰이었다. 부상을 당해 붙들린 세 놈 말고는 지난 밤에 집을 비우고 안 들어온 놈은 하나도 없다는 보고였다. 날이 밝기 전에 빨갱이들이 모두 집을 찾아들어가 오리발을 내밀었다는 결론이었다. 염상구는 형에게 여지없이 당하고 낭패감을 질겅질겅 씹었다. [염상구] "니미럴 눔, 워디 두고 보자." 그는 빠드득 이빨을 갈아붙이고는 경찰서로 내달았다. 세 명의 포로를 사정없이 주리를 틀어댔다. 거품을 물고 까무러치면서도 그 놈들이 입에서는 한결같이 저희들이 아는 것은 '염상진 대장님뿐'이라는 것이었다. 저희들끼리도 동지인 것을 몰랐다는 것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염상구는 말로만 들었던 공산당의 점조직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고, 또 한 번 형에게 패배하는 기분이었다. [염상구] "지까짓 눔이, 워디 두고 보자." 그러나 5월 10일, 염상구로서는 더없이 신바람나는 첫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때까지 형은 더는 습격을 가해오지 않았다. 형이나 좌익이라는 것을 썩은 홍어 좇 정도로 우습게 취급하고 있었던 염상구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그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좌익의 습격이라는 통고를 받고도 코웃음을 쳤었다. 겨드랑이가 스물거리던 판에 총질이나 한바탕 해볼까 하는 식으로 느슨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이미 경찰서를 빼앗기고 보성 쪽으로 후퇴를 했다는 것이었다. 지난번 경우를 생각할 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염상구는 혁대를 단단히 죄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역전에 다다르기도 전에 사태가 불리하게 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길거리에 어제와는 다른 냉기가 싸아하게 돌았고, 얼핏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이 핫바지에 총을 든 녀석의 모습이었다. 얼쩡거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쩐다? 어디로 도망을 간다? 경찰은 보성 쪽이라고 했지? 염상구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잡히는 날에는 경찰 못지않게 당할 것이었다. 보성 쪽으로 가기에는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경찰의 반대방향으로 튀자. 그것이 안전도가 높을 터였다. 보성의 반대쪽이면 고흥이었다. 고흥을 떠올리자 연줄로 소록도가 생각났다. 그래, 문둥이들 속에 숨어버리면... 염상구는 그 길로 똥줄이 빠지게 뱀골고개를 넘어 고흥 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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