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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5장 조계산 숯막

by 나무 심고 책읽는...... 꿈은계속된다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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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대하소설

1-5(1) 태백산맥 조정래 대하소설 제1권 5장 조계산 숯막

https://youtu.be/UYvVJHl6sdY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권  제 1 부 한의 모닥불  5장  조계산 숯막

      5. 조계산 숯막

염상진과 하대치 일행이 서리 내리는 10월 하순의

산중 야기(夜氣)를 헤치며 조계산 초입에 당도한 것은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한 번도 멈춤이 없이 산길 70여리를 내달아온 발걸음이라

뼈끝을 시리게 하는 산중 추위는 아랑곳없이

모두의 몸은 끈적한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내쉬는 숨결마다 허옇게 김이 서렸고, 피로한 단내가 묻어났다.

 

[염상진] "일단 정지!"

염상진이 낮으면서도 절도 있는 목소리로 말하며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모두는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일제히 몸을 낮춰 쪼그려 앉았다.

그 동작들이 훈련으로 숙달된 것처럼 정확하고 기민했다.

그들은 그런 식의 훈련을 받은 바 없었지만

공통적인 위기의 긴장감이 그들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염상진]  "분명 요 근방 어딜 것인디..."

염상진이 전방을 부정확하게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하대치]  "멀 찾으시는디요?"

하대치가 쪼그려 앉은 채로 그러는 염상진을 올려다보며 눈치 빠르게 물었다.

 

[염상진]  "선암사 사리탑 자리가..."

 

[하대치]  "사리탑 자리 여라?"

 하대치는 말하며 일어서고 있었다.

전방 좌우를 유심히 살폈다.

그런 하대치의 머릿속에서는 벌써 10여 년 전에

아버지와 함께 두어 번 다녀갔던 기억을 신속하게 더듬고 있었다.

아버지는 시주라고 해야 고작 쌀 한 됫박 정도밖에 못하는 신세이면서도

굳이 먼 길을 걸어 선암사를 찾아다녔던 것이다.

조계산 자락에서 화전을 일구어 먹은 것도,

벌교 땅에서 그나마 뿌리 내리고 살게 된 것도

모두 선암사 부처님의 가피 덕이라는 것을 하대치에게 일깨웠다.

 

 

니기미, 부처님 가피를 받아서 그리 알량허게 사는구만.

씨펄눔의 것, 고런 가피라먼 떡 해놓고 빌어도 싫다.

점심도 쫄쫄 굶고 먼 길을 걷는 것만 싫어서 하대치는 속으로 상소리를 내질렀던 것이다.

 

[하대치]  "맞구만이라.

사리탑 자리는 여그가 아니라 쪼깐 더 올라가야 허겄 구만요."  

 

산세와 길목이 눈에 익은 것을 확인하면서 하대치는 자신있게 말했다.

 

[염상진]  "그럼 이 개울을 타고 올라가지."

 

  염상진이 앞장섰다.

짙은 안개가 계곡을 가득 채우고, 산자락이 휘감고 있었다.

그 안개 위로 먼동이 터오는 여린 빛이 내리며

단풍 든 숲 속에 도사린 어둠을 서서히 표백시키고 있었다.

몸집 작은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안개 속 그 어디에선가 방울을 굴리듯 경쾌한 음향을 뿌렸다.

그건 개울가의 잔돌들이 저벅저벅 밟는 사람들의 기척에 놀란

새들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새들은 먼동이 터오는 빛으로 잠이 깨어

날개 퍼덕이며 첫 울음을 우는 것이었고,

그 울음소리를 듣고 산도 깨어나고 있었다.

 

[하대치]  "사리탑 자리가 쩌그 보이는구만요."

하대치는 그곳에서 모종의 접선이 이루어지리라고 예상하며

건너편을 손가락질했다.

 

[염상진]  "그렇구만."

염상진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며,

 

[염상진] "모두 여기서 대기하시오. 하 동무는  나허고 가고."

 

절도있게 지시했다.

 

염상진은 큰 키를 이용해서

길 쪽의 경사 급한 비탈을 성큼 올라섰고,

그 뒤를 키 작은 하대치는 나무 등걸을 타오르는 다람쥐처럼

날랜 동작으로 따라붙었다.

나머지 일곱 명은 개울 여기저기에

제멋대로 서있거나 앉은 커다란 바위들을 골라 몸을 감추었다.

순식간에 개울에는 인적이 사라졌다. 안개에 에워싸인 심산의 정적만이 깊었다.

 

염상진과 하대치는 길을 가로질러 사리탑 자리로 접근했다.

실히 열 길은 넘을 듯싶은  아름드리 전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가지각색의 사리탑이 스무 개가 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염상진이 하대치의 위치를 손가락으로 지시했다.

하대치는 지시받은 사리탑에 몸을 찰싹 붙였다.

그의 차갑게 긴장된 눈길은 염상진을 향하고 있었다.

10미터 정도 옆으로 자리잡은 사리탑에 몸을 붙인 염상진이

하대치를 향해 검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잡아 입에다 대고 부는 시늉을 했다.

염상진은 그 다음 동작으로 손가락 세 개를 허공에 빳빳하게 펴보였다.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하대치는 자세를 바꿔 두 무릎을 땅에 대고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입으로 가져갔다.

 

[하대치]  풀꾹, 풀꾹, 풀꾹.

 

쉰 듯하면서도 슬픈 음조의 풀꾹새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세 번 울리며 심산의 정적 속에 그 무늬를 새기듯 선명했다.

끼룩, 끼룩, 끼룩.  아름드리 전나무 숲에서 들려온 기러기 소리였다.

위치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바로 가까운 곳이었다.

 

[염상진]  "됐다!"

염상진이 단내가 묻어나는 숨결을 토해내며 말했다.

하대치도,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접선이 일단 성공한 것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염상진]  "하 동무, 앞으로."

염상진이 손짓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이 즐비하게 늘어선 사리탑들 사이를

옹송그린 걸음으로 중앙 부분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이 허리 높이의 돌담을 뛰어넘어 오는 참이었다.

 

[염상진]  "안 동무!"

 

염상진이 먼저 불렀고,

 

[안창민]"위원장 동무,  무사하셨 구만요."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올리며 사내가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하대치는 그만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바로 북국민학교 선생인 안창민 동무였던 것이다.

그가 왜 예기치 않은 이런 장소에 나타났는지를 하대치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염상진은 역시 위원장이고 대장답게 행동한 것이었다. 

염상진은 이미 신분이 노출된 각 마을의 동무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한 발 앞서 미리 떠나 보낸 것이 분명했다.

 

[염상진]  "동무들은?"

염상진이 나직하게 물었고,

 

[안창민] 22명 전원  이상 없이 숯가마에 대기중에 있습니다."

 

안 동무가 흘러내리지도 않은 안경을 습관적으로 밀어올리며 대답했다.

 

[안창민]  "날이 너무 밝았습니다."

안 동무가 아름드리 전나무 숲으로 가려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고,

 

[염상진] "어서 뜹시다"

염상진이 빠른 동작으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하대치는 뒤를 바짝 따르며 또 한번 대장 염상진에게 놀라고 있었다.

어젯밤 아홉 명만이 일행이 되어

오금제를 넘으면서 영락없이 다른 동무들은 모두 버려두고 떠나는 줄 알았었다.

너무 숨가쁘게 진행 된 후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염상진은 미리 입 한번 떼지 않은 채 그 일을 말끔하게 처리 한 것이었다.

그런 염상진이 대장으로서 더없이 믿음직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 마음이 몇 수십 겹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제 때의 소작쟁의 사건 전부터였으니까

염상진과의 사이가 어느덧 10년 세월이 넘었으면서도

그 속의 깊이를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대장은 그 정도는 되어야 하고,

그래서 대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언제나 똑같은 깨달음으로 하대치는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염상진 대장이 시키는 대로만 따르면

언젠가는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리라는 새로운 확신이 섰고,

그 새롭게 솟는 힘을 다 바쳐

충성스런 부하가 될 것을 하대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고는 했다.

 

그들은 차츰 엷어져가는 안개를 헤치고 30분 남짓 걸어 숯가마에 도착했다.

해는 아직 솟지 않았지만 먼 하늘은 눈이 부신 현란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염상진은 아침이 열려오는

그 찬란하고도 황홀한 빛의 기막한 조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 빛의 찬란함으로, 저 빛의 활홀함으로 공산 혁명의 아침이 열리는 줄 알았었다.

햇덩이 같은 뜨거운 열기로 혁명의 힘이 폭발해서

반동의 세력을 일거에 재로 태워 없애고 혁명의 새 천지가 이룩되리라고 믿었었다.

 

 남조선의 지하조직이 깃발을 올린 그 절호의 기회에

북조선의 주력은 정작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둠을 이용한 후퇴, 그건 후퇴가 아니다.

야음을 틈탄 패주다, 굴욕스러운 패주다...

 

[안창민]  "위원장 동무, 모두 모였습니다."

안창민이 옆에 와 서며 보고했다.

 

[염동진]  "알겠소."

 

염상진이 가슴속에서 들끓어 오르기 시작하던

분노의 열기를 감추기라도 하듯 눈길을 발끝으로 떨구며 대꾸했다.

지금 그의 감정은 아침 햇살이 퍼지고 있는 동녘 하늘과는 정반대로

캄캄한 어둠이었고 암담한 좌절뿐이었다.

 

후퇴, 패주, 그 어느 것이든 상관이 없다.

그건 말의 뜻이나 강도만 다를 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

상대적인 힘의 약세 때문인 것이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북조선의 힘은 막강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혁명의 붉은 깃발을 세웠고,

이듬해에 지주와 부르주아 계급 말살과 함께

토지개혁을 완료한 북조선의 조직화된 공산주의의 힘은 경이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미 군정하에서 시작된 남조선은 어떠했는가.

친일파와 지주계급이 군정과 어울려 득세를 했고,

새 시대의 국민을 위해 실시한다는 토지개혁은

해방 3 년이 지나도록 단행을 하지못한  상태였다.

그건 오합지졸이 모인 힘의 비 조직화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힘은 조직화될수록 강해지고,

그 힘은 공격을 감행할 때 더 강해지고,

그리고 승리를 쟁취했을 때 그 힘은 절정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건 힘의 법칙이고, 힘의 미학이었다.

북조선의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힘은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면

남조선의 오합지졸인 비조직화된 힘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한반도 전역에 공산 혁명의 깃발을 나부끼게 할 것임을 굳게 믿어왔다.

 

그래서 굶주리며 쫓기는 투쟁을 불사했던 것이고,

마침내 봉기의 때가 왔음을 확신하고

읍내를 장악한 다음 무차별한 혁명의 숙청을 감행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늘처럼 믿었던 북조선의 조직화된 힘은 뻗쳐 오지 않았고,

오합지졸인줄만 알았던 남조선의 힘에 쫓기게 된 것이다.

힘은 힘 앞에서만 굴복한다.

왜 북조선은 힘을 쓰지 않은 것인가.

남조선일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었는가.

그럼 북조선의 힘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일까.

 

아니다, 아니다..

염상진은 깊이를 더해가는 회의를 떼쳐내려고 괴로운 신음을 물었다. 

자신의 마음을 회의와 절망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했다.

그때 염상진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분명 이랬을 것이다.

 

[염상진]  "그래, 이 번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염상진은 스스로를 일깨우듯 낮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목판을 새기듯 자신의 가슴에 선명하게 박히는 것을 느꼈다.

 

[염상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은 어리석은 내 판단일 뿐이지." 

 

염상진은 어느덧 자아비판의 자세로 바뀌어 있었다.

당은 언제나 위대하고, 현명하며, 신성한 것이다.

당은 비판의 대상일 수가 없고, 회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염상진은 죄책감을 느낌과 동시에 새로운 힘의 탄력을 얻었다.

당의 현명한 판단에 의한 혁명의 날이 도래할 때까지

용맹스러운 투쟁을 전개하는 것만이

자신이 해야 할 임무라는 것을 확신했다.

염상진은 숯막 쪽으로 돌아섰다.

 

사람이 떠난 지가 오래 된 숯막은

퇴락할 대로 퇴락해서 비바람을 막기에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일본인들이 물러간 다음부터 숯의 소비가 절감되어

조계산의 숯가마도 자연히 사양길로 접어든 것이다.

상여 움막보다 더 을씨년스러운 꼴을 한 숯막을 바라보고 있는 염상진의 시야에는

아버지의 늙은 모습이 어릿거리며 겹쳐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숯장사를 억척스럽게 했었다.

 

염상진은 아버지의 상념을 밀어내듯 숯막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숯막의 하나뿐인 방에는

밤새워 오금재를 넘어온 대원들이 비좁게 붙어 앉아 있었다.

방안에는 숯내가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먼저 도착한 축이 숯등걸이라도 모아 불을 피웠던 모양이었다.

염상진은 좌중을 훑어보았다.

모두 어떤 결의가 담긴 긴장된 모습들이었지만

밤을 새워 산길을 걸은 피로한 기색은 역력했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동물적인 욕구의 해결이었다.

배가 고플 것이고, 잠이 올 것이다.

정신무장은 그 다음 단계였다.

 

[염상진] "동무들, 먼 길 오느라고 수고들 많았소.

동무들은 지금 배가 고프고 잠이 올 것이오.

당장 그 문제부터 해결합시다. 자, 조를 나눠 시작하시오." 

 

좌중에는 잠시 의아해하는 침묵이 감돌았다.

사태의 중대함만큼 이야기도 길 것이라고 마음 작정하고 모여 앉은 그들에게

염상진의 태도는 너무나 뜻밖이었던 것이다.

 

 

염상진은 대원들의 마음 움직임을 환히 들여다보며 큰 소리로 하대치에게 지시했다.

그때서야 하대치가 벌떡 일어났고, 좌중의 긴장이 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염상진은 내밀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태가 다급할수록, 상황이 긴박할수록 어느 시간까지는 느긋할 필요가 있었다.

그 여유를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긴장된 군중심리의 불안감을 해소시킬 수가 있고,

지휘자로서의 배짱의 두께도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급한 불덩이는 일단 피한 셈이고, 행동개시를 할 수 있는 밤까지는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아침밥을 먹인 다음 재우면 오전이 다 갈 것이다.

그 동안 몸 날랜 하대치라도 쌍암면으로 내보내면

 어떤 정보라도 접수하게 될지 모른다.

 

[하대치]  "동무들, 내가 많이 나서는 안될 것 잉께

솥은 숯가마 안에다 걸고,

나무는 뽀짝 마른 솔갱이럴 때도록 허씨요."

 

하대치가 식사 당번 조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염상진은 곁눈으로 그런 하대치를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배움은 많지 않지만 타고난 머리가 있고,

건강한 몸에 용기까지 지니고 있는 하대치는

어느 모로 보나 소중하고 충직한 부하였다. 

무슨 일을 맡겨도 마음 든든했다.

 

하대치의 지시를 받고 대원들은 다 밖으로 흩어져나갔다.

텅 빈 방에 우뚝 서 있던 염상진은

문득 무릎이 접히는 것 같은 무거운 피로감을 느꼈다.

다 해진 왕골 돗자리가 깔린 방 바닥에 그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마누라와 두 자식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눈을 꼭 감았다.

 

[염상진 처] "음마,  음마,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그렁께, 쬧겨간다 고런 말이제라?"

 

마누라는 괄괄한 성미 그대로 말을 쏟아냈다.

 

[엄상진 처] "워매, 인자 두 다리 뻗고

권세 누림시롱 살만헌 시상이 왔능 갑다 했등만

열흘이 못가 요무신 꼴이 당가."

 

마누라의 끝이 없을 사설을

더 듣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는 문을 박차고 나섰다.

 

[염상진 처] "아이고 요런  문딩아,

공산당 헐라먼 애시당초 장개럴 들지 말든지,

장개럴 들었으먼 새끼덜이나 싸질르지 말든지. 

지리산 호랭이가 칵 씹다가 도로 뱉을 요 문딩아,

나만 새끼들허고 어찌 살라고 혼자 내빼는겨."

 

마누라의 목소리가 담을 넘을 만큼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쫓기듯 사립을 나와 고샅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안창민]  "노곤하신가요?"

염상진은 눈을 떳다.

안창민이 꺾은 무릎에 손을 받치고 구부린 자세로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염상진]  "앉으시오, 안 동무."

염상진은 웃는다고 웃었지만

그렇게 빨리 감정 전환을 시킬수가 없어

안면근육이 어색하게 씰룩였을 뿐이다.

마누라의 말마따나 장가를 들지 말았든지,

마누라가 좀더 혁명가의 아내답든지 했어야 했다.

 

[안창민]  "사태가... 어찌 전개되고 있는지..."

안창민은 염상진의 정면을 피해 약간 옆으로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염상진]  "안 동무, 수고 많았소.

그 많은 인원을 인솔하면서 취사도구까지 챙기느라고." 

 

염상진은 엉뚱한 말을 했다.

 

[안창민]  "아니, 지가 머...

딴 동무들이 다 알아서 했지요."

 

안창민은 안경을 다급하게 밀어올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물거렸다.

그는 괜히 소리를 지껄였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염상진]  "안 동무,

우린 이제부터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하게 될 것이오." 

 

염상진은 안창민의 안경 알을 곧 뚫을 것처럼

매운 눈길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도수 높은 안경알 저쪽의 눈동자가

염상진의 눈길을 받아내지 못하고 아래로 굴렀다.

눈동자를 덮어내린 눈꺼풀이 바르르 경련했다.

 

[염상진]  "너무 걱정 마오.

혁명의 성취는 투쟁 다음에 얻어지는 열매요." 

 

염상진은 안창민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이 남자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고 부드러웠다.

그건 그의 모든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물이었다.

그의 출신성분, 성장과정, 사상 배경까지     그 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는 하대치와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염상진은 그에게 하대치와는 또 다른 애정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안창민]  "가서 일해야 되겠습니다."

안창민은 옹색한 자리를 피하려는 듯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염상진은 자기의 손에 잡혀 있는 안창민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느꼈다.

 

[염상진]  "그러시오, 안 동무."

 염상진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며 안창민의 손을 놓아주었다.

안창민을 당장은 그런식으로 눌러놓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현재로서는 자신도 사태파악이 안되고 있는 형편이라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모른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그런 식으로 처리한 것뿐이었다.

 

사태가 정확하게 파악되면

자신들의 행동방향도 결정 될 것이므로

안창민에게 어차피 알려야 될 것이었다.

안창민은 그에게 있어 하대치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안창민의 명석한 두뇌와 예리한 판단력은

하대치의 기민한 행동과 과감한 용기와 함께 그를 늘 든든하게 받치는 기둥이었다.

 

안창민은 염상진의 사범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염상진에게 3년이, 김범우에게 1년이 아래인 안창민은

두 사람을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그들 셋은 사회주의 이념에 마음을 하나로 뭉친 때가 있었다.

이미 과거의 흔적뿐이긴 했지만    고읍 들녁의  대지주 집안의 아들 안창민이

 사회주의에 경도된 것은 순전히 염상진에 의해서였다.

 

[안창민] "형님, 용서하십시오.

저는 교단에 서야 되겠습니다.

어머니의 고생을 그만 끝내드려야지요.

형님한테 면목없는 일이지만, 어쩌겠습니까."

 

안창민은 졸업을 앞두고 염상진을 찾아와 이해를 구했던 것이다.

그때 이미 염상진은 농사를 지으며

적색농민운동을 독립운동과 같은 맥락으로 밀고 나가고 있었다.

같은 사회주의 이념을 신봉하면서도 그 선택은 달랐다.

염상진이 더 이념적으로 투철하고, 안창민이 그렇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인간적인 기질의 차이였다.

안창민은 체구부터가 선병질적으로 가늘게 생긴데다가 마음마저 여렸다.

눈까지 나빠 안경을 끼었으니 그는 한결 허약해 보였다.

 

염상진이 곧잘, 머리 좋은 것 하나 빼버리면

장타령하는 거렁뱅이만도 못할 거라는 좀 지나친 농담을 해도

그는 씨익 웃고는 그만이었다.

그러나 염상진이 '감상적 사회주의자'라거나

'관념적 사회주의자'라고 비꼬면 그는 얼굴이 하얗게 변하도록 흥분을 하고는 했다.

 

안창민에게 홀로인 어머니가 소중했다면,

염상진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도 결코 그만 못하지 않았다.

그런데 염상진은, 평생을 숯장사를 하며 아들을 가르쳐 

'선상님'되기를 고대한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을 뿌리치고 농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염상진] "그래, 그래. 사람이 어찌 다 하나같을 수가 있겠는가.

자네는 선생으로, 나는 농부로 최선을 다허세.

뜻이 같으면 결국 닿는 길도 같을 거니까."

 

염상진은 안창민의 교단 행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해방이 되고 염상진이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행동화시키면서 한 차례 감옥생활을 거치고,

뒤이어 쫓겨다니는 수난을 겪는 동안에도

안창민은 정치 회오리의 무풍지대인 국민학교 울타리 안에 안주해 있었다.

그렇다고 그는 코흘리개들에게  '나비야, 나비야'나 가르치는

시장스런 훈장 노릇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수심 깊이 잠겨 있는 보이지 않는 섬이었다.

그는 염상진이 피신해 있는 동안 읍내 지하조직을 움직여나간 그림자 없는 손이었다.

 

그가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었던 것은 물론 염상진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그는 물 위로 불쑥 솟긴 섬이 된 것이었다.

그의 느닷없는 변신은 우선 학교 선생들을 까무러치게 할 만큼 큰 충격이었다.

붉은 완장을 찬 그의 앞에서 선생들은 하나같이 전전긍긍했다.

특히 평소에 사회주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말해온 몇몇 선생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붉은 완장을 찼다고 해서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전과 마찬가지로 별로 말이 없었고,

어떤 권한 행사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가 오히려 선생들을 더 두렵고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안창민] "선생들 대하기가 영 기분이 찜찜해요."

그가 떫은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고,

 

[염상진] "거 무슨 소리요,

안 동무. 그거야말로 우리 조직의 탁월성을 입증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염상진은 약간 언짢은 기색을 띄며 면박을 주듯 말했다.

그는 처형의 대창을 들지도 않았고,

주변의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았지만 

결국 후퇴의 대열에 끼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안창민은 고읍 들의 지주 안재윤의 하나뿐인 손자였다. 

한말까지 행정의 중심을 이루었던 낙안고을에

대대로 뿌리를 내려온 안씨 문중은

그 뼈대로나 재력으로나 넉넉히 큰기침을 할 만했다.

 

안재윤은 학문도 꽤나 깊었고 덕망도 갖추었지만

망국의 비운과 함께 날개를 잘린 새 신세가 되었다.

그는 말년에 망나니 아들로 속을 썩일대로 썩이다가

화병을 얻어 제 명을 다 못 살고 죽었다.

그때 벌써 아들 안서규는 투전판을 들락거리고

주색에 빠져 재산의 반 이상을 날린 상태였다.

 

안재윤이 죽고 나자 가세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졌다.

안서규는 방탕한 생활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마침내 전답 거의를 헐값에 팔아치워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것으로 안재윤의 집안은 겨우 논 30여 마지기를 가진 소지주로 전락했고,

뼈대 자랑하던 안씨 문중은 덩달아 근동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망신을 감수해야 했다.

 

종적을 감춘 안서규는 3년이 못 되어 남원에서 객사했다는 소식이 왔다.

안창민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그러나 안창민의 어머니 신씨는 그 정도의 재산이나마 남아 있는 것을 천행으로 여겼다.

궃은 일 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신씨가

직접 논두렁에 나서게 된 것이 그때 부터였다.

손수 농사를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몇 안되는 작인들을 독려했고,

눈에 띄는 피를 뽑으려고 논에 예사로 들어가는가 하면,

새떼를 쫓으려고 있는 껏 소리치며 논두렁을 맴돌았다.

그런 신씨를 먼발치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안쓰러운 혀를 찼고,

작인들은 농사일에 성의를 다 바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씨가 아들의 제의에 따라 표나지 않게 소작료를 낮춘 것은

안창민이 사범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안창민]  "결정적인 시기라는 걸 무엇으로 확정할 수 있습니까?" 

 

안창민은 안경알을 빛내며 냉담한 어조로 물었다.

무모한 감정적 행동이거나

일시적 기분에 좌우된 오판이 아니냐고 신중을 기하는 것이었다.

그건 허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른 안창민 특유의 예리함이기도 했다.

염상진은 그가 필요로 하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물거릴 수도 없었다.

 

[염상진]  "날 믿으시오. 큰일에는 비밀이 따르게 마련이니까." 

 

그건 안창민의 신중성에 대한 결정적인 거짓 발언이었다.

염상진은 그만큼 확실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안창민]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안창민은 빨간 완장을 차게 되었다.

 

지난 4월 3일 제주도에서 혁명의 깃발을 올린 것은

그 곳을 해방구로 하여 남조선의 단독정부 수립의 음모를 분쇄함과 아울러

남조선 전역의 해방을 성취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제공하는 화력으로 무장한 군경이 계속 투입된 것이었다.

화력의 열세와 사방이 바다로 차단된 악조건 속에서

전사들은 벌써 7개월에 걸친 투쟁을 전개해오고 있었다.

 

이번에 혁명의 깃발을 또 올린 여수 주둔 14연대도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파견될 부대였다.

'지구별로 투쟁 개시하라.'

 지령은 언제나 간단 명료했다.

 그 어떤 설명이나 해설이 붙지 않는 것이 지령의 본모습 이었다.

 

 첫째, 전라 남도의 일부인 제주도에 국한하지 않고 전남 전역을 해방구로 설정한다.

둘째, 지역을 확대함으로써 투쟁을 적극화시키고,

 아울러 적의 화력을 분산시켜 제주도 전사들의 투쟁이 용이하도록 유도한다.

염상진이 지령을 통해서 유추해낸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유추일 뿐 당의 공식적 언명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미줄이 얽힌 숯막의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염상진은

고개를 떨구며 휴우 한숨을 쉬었다.

한번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절대 후회하지 말 것을 신조로 삼고 있으면서도

안창민의 신분을 노출시킨 것이 자꾸만 후회로 되살아 올랐다.

자신의 오판이나 그의 말을 봉쇄하기 위해 한 거짓말은 문제가 아니었다.

완전 파괴되다시피 한 읍내 조직과 그에 따른 앞으로의 일이 난감했다.

 

읍내에는 이제 미온적인 세포 몇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경찰의 색출작업이 시작되면 어떻게 될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안창민을 노출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보다 더 완벽한 거점은 없었을 것이다.

배수의 진을 쳐야 했던 것인데...

염상진은 다시 진득한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꺼냈다.

 

염상진은 담배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푸르스름한 담배연기는

공중에서 추상의 몸짓을 지으며 빠르게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

순간순간 변하는 그 몸짓의 유연함은 다음의 변화를 예측할 수 없게 했다.

그렇다. 자신이 살아온 지난 몇 년 세월이 저와 같았고,

앞으로 살아내야 할 세월도 저와 같이 전혀 예측 불가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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